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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언어가 힘이다 <5> 외래어 남용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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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세계화 시대에 국가나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고 해서 외국어가 우리말을 밀어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하게 외국어를 남용한다면 민족문화와 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우리말은 점점 밀려나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외국어나 외래어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외국어, 특히 영어가 얼마나 남용되고 있는지, 영어식 표현이 우리 글의 고유한 표현 방식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 등을 정리했다. 다음 회에는 패션 분야 등의 외래어 남용과 외래어 표기 원칙 등을 다룬다.

배상복 기자


‘외국어’와 ‘외래어’의 구분

외국어는 단순히 다른 나라의 말을 뜻한다. 영어·프랑스어·일본어 등 다른 나라가 사용하는 언어를 일컫는다.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로 국어처럼 쓰이는 단어를 지칭한다.

넓은 의미에서 외래어는 한자를 포함하지만 한자말은 우리말에 들어온 지 오래 돼 외국어라는 느낌이 없어졌고 낱말의 형태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외래어에선 제외한다. 좁은 의미에서 외래어는 ‘텔레비전’ ‘카메라’ ‘햄버거’ 등 주로 서양에서 들어온 말로 외국어에서 온 말이라는 느낌이 뚜렷한 어휘를 가리킨다. 외래어는 이미 우리말화된 것이므로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외래어 남용을 지적하는 경우의 외래어는 좀 다르다. 이때의 외래어는 우리말화된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말을 두고도 불필요하게 사용되는 외국어 어휘를 가리킨다. 즉 ‘화이트’ ‘블랙’ 등 우리말 대신 쓰이는 외국어나 ‘KOTRA’ ‘POSCO’ 등처럼 사용되는 외국어 문자 표기를 일컫는다.



공공기관의 외래어 남용

외래어를 남용하는 것은 거리 간판이나 사기업 이름 등 민간 부문만이 아니다. 우리말을 보호하고 장려해야 할 정부나 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이 행정기관의 이름이나 정책명, 제도 등에 불필요하게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주민센터 동사무소가 바뀐 이름 ●치안센터 파출소 가운데 민원상담 위주로 주간에 업무를 보는 곳 ●서울메트로 지하철공사가 바뀐 이름 ●SH공사 도시개발공사가 바뀐 이름 ●KT&G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바뀐 이름 ●코레일(KORAIL) 한국철도공사가 바뀐 이름 ●하이 서울 서울시의 구호 ●다이내믹 부산 부산시의 구호 ●플라이 인천 인천시의 구호 ●잇츠 대전 대전시의 구호 ●프라이드 경북 경상북도의 구호 ●유어 파트너 광주 광주광역시의 구호 ●울산 포유 울산시의 구호 ●허트 오브 코리아 충남 충청남도의 구호 ●패스트 천안 천안시의 구호 ●어메니티 서천 서천시의 구호 ●동북아의 허브 도시 송도 신도시 개발 등으로 인천시가 내걸고 있는 목표 ●테크노파크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지역산업 육성 발전의 중심 기관 ●혁신클러스터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산·학·연을 하나로 묶어 지방공단에 설치한 연계체 ●컨벤션센터 국제회의·박람회·전시회 등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할 목적으로 설립된 시설 ●스크린도어 지하철 출입문과 연동해 개폐될 수 있도록 만든 안전 장치에 붙인 이름 ●쿨비즈 코리아 간편복 차림으로 여름철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운동을 이르는 정책 용어 ●지역균형발전로드맵 지역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목표와 추진 일정 ●컬러풀 대구 페스티벌 대구시가 주최하는 시민축제 ●언더패스 하천을 따라 길이나 다리 아래로 지나는 도로의 표지판에 적힌 내용 ●하이패스 달리는 차 안에서 무선통신을 이용해 통행료를 지불하는 전자요금 징수 시스템 ●디자인월드플라자 패션과 디자인 산업을 선도하기 위해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조성하는 복합 시설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서울시가 서울을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작업에 붙인 이름 ●원스톱행정서비스 1회 방문으로 모든 행정 절차를 끝마치게 하는 서비스 ●버블세븐지역 집값이 높은 일부 지역을 거품에 비유해 부른 이름 ●대학생 멘토링 대학생이 저소득층 학생과 일대일로 정기적으로 만나 교사·상담자 역할을 하는 제도 ●데이케어센터 주거밀착형 치매노인 요양시설로 노인들을 주·야간 보호하는 곳 ●기초 푸드마켓 서울시 자치구가 기초생활수급자·소년소녀가장 등을 직접 방문해 이들이 물품을 선택·이용할 수 있게끔 하는 제도 ●전자바우처 중증 질환 노인과 장애인 등이 특정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불을 보증하는 일종의 전표



영어식 표현

외래어 단어에 의해 우리말이 오염된 것 못지않게 외국어식 표현에 의해 우리말의 본래 표현 구조가 뒤틀리고 파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영어를 공부하면서 익숙해진 표현들이 무의식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진행형 남용 우리말에서는 영어처럼 특별히 진행형이 있는 게 아니다. 상태나 진행을 뜻하는 ‘있다’가 ‘~고 있다’ 형태로 진행형을 대신한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체계를 무시하고 영어의 ‘~ing’를 공부하면서 배운 ‘~중이다’가 마구 쓰이고 있다.

※경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다각도로 대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 경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다각도로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과거완료 남용 과거보다 이전 사실을 나타낼 때 관거완료형을 쓰는 것은 영어식 표현이다. 우리말에서는 과거완료가 불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5년 전 결혼을 했었는데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했다.

→ 5년 전 결혼을 했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했다.

피동형 남용 영어의 영향을 받아 피동형 문장이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피동형을 쓰면 문장이 어색해질 뿐 아니라 행위의 주체가 잘 드러나지 않아 뜻이 모호해지고 전체적으로 글의 힘이 떨어진다.

※미개척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현지 진출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 미개척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현지 진출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들’의 남용 우리말에서는 이야기의 앞뒤 흐름으로 복수임을 짐작할 수 있거나 문장 속에 있는 다른 어휘로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 ‘들’을 붙이지 않는다. 복수에 꼬박꼬박 ‘들’을 붙여 쓰는 것은 영어식 표현이다.

※지금까지 치른 행사들 가운데 이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지금까지 치른 행사 가운데 이번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

‘~를 가지다(갖다)’의 남용 영어의 ‘have’를 그대로 번역한 듯한 ‘~를 가지다’ 또는 ‘~를 갖다’ 표현을 남용함으로써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이 밀려 나고 있다.

※‘기자회견을 가졌다’ ‘회담을 가졌다’ ‘집회를 가졌다’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기자회견을 했다’ ‘회담을 개최했다’ ‘집회를 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시어 남용 영어의 특징 중 하나가 지시어 용법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영어에서는 앞에 나온 내용이 뒤에서 반복될 때는 반드시 지시어로 바꾸어 표현한다. 국어에서도 지시어가 쓰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엄격하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올해 매출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비교적 상황이 나았던 지난해의 그것보다 오히려 늘었다.

→ 올해 매출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비교적 상황이 나았던 지난해보다 오히려 늘었다.

뒤바뀐 어순 영어에서는 인용구가 먼저 나오고 주어와 서술어가 뒤에 오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말에서는 주어가 앞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다.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 그는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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