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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은 슬프지만 왕,양반,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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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20면

한성감옥에서 찍은 이승만과 옥중 개화당 동지들의 사진. 왼쪽 중죄수 복장이 이승만이다(1903). 이화장 제공

이승만은 혁명가다. 일반인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망각과 왜곡의 결과다. 이승만은 민(民)을 동원해 시위ㆍ항의ㆍ청원 활동을 벌이는 선동가였다. 그 때문에 그는 거의 6년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혁명가 이승만

1897년 6월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한글 전용 신문인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간했다. 조선 왕조를 변혁하고 열강의 국권 침탈을 저지하는 운동의 선봉에 나선 것이다. 서재필이 세운 독립협회에 가입한 그는 1898년 만민공동회로 불리는 대규모 대중집회에서 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정부측 수구파가 동원한 보부상 무리들과 혈투를 벌이는 행동가로도 인정 받았다.

고종황제를 압박한 효과가 있어서 독립협회는 정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17명의 민간인측 의관(議官)을 파견하게 됐고, 거기에는 이승만(당시 23세)도 포함되었다. 첫 회의에서 이승만 등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관직을 맡기자고 제안하자, 고종 황제는 격분했다. 황제에게 박영효 등 개화파는 역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승만 등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세우기 위한 역적 모의를 했다는 혐의로 1899년 1월 체포됐다.

혁명동지인 한글학자 주시경이 면회장에서 권총을 몰래 건네자, 이승만과 다른 2명의 배재학당 출신 피검자들은 간수를 위협하며 감옥을 빠져 나갔다. 이승만은 곧 체포됐다. 1명은 만주로 도주했지만, 또 다른 1명은 체포돼 사형됐다. 이승만이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받은 것은 미국 공사 알렌(H. N. Allen)을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의 끈질긴 구명 운동 때문이었다.

혁명 동지 최정식은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날 이렇게 외쳤다. “이승만 씨,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시작한 일을 끝맺으시오.” 군주제와 신분제를 타도하기 위한 자유주의ㆍ공화주의 혁명이 이들이 “같이 시작한 일”이었다. 이들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그러한 급진사상을 가르친 것은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과 미국인 교사들이었다.

이승만은 원래 과거를 준비했으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영어라도 배워보자는 절망적인 심정에서 배재학당 입학을 결정했다. 거기서 그는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됐다. 이 세상에는 미국처럼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토대로 건설된 민주주의 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이승만은 그의 지지자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표현대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제퍼슨적 자유주의자(Jeffersonian liberal)”가 됐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하와이에 세운 한인기독학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남녀공학제를 시행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소작인을 지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농지개혁을 강행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반(反)봉건적 자유주의 사상은 러ㆍ일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04년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 속에 잘 표현돼 있다. 그 책의 요지는 군주제와 신분제로 찌들어 멸망 직전에 이른 대한제국이 살아남으려면 미국식 자유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찬양은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공화제에 대한 찬양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공화제를 주장하는 것은 역적행위였으므로 “조선에는 입헌군주제가 적합할 것”이라는 ‘도피성’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를 꿰뚫고 있는 흐름은 공화주의였다.

이승만이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은 제중원 원장이었던 의료 선교사 올리버 애비슨(1860~1956) 박사의 글 속에도 나타난다.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애비슨 박사가 1949년 미국에서 보낸 편지에 따르면 청년기의 이승만은 서울에 있는 애비슨 박사의 집에 매주 드나들며 군주제를 폐지한 뒤에 도입될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1904년 미국 유학을 떠날 때 고종 황제는 그를 만나려 했다.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할 밀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면담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무능한 군주, 그리고 무지하고 부패하고 이기적인 양반층과 집권층을 모두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1910년 10월 서울로 돌아와 일본에 합병된 조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ㆍ양반ㆍ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

6년간의 감옥 생활 중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고 ‘기독교적 생활 방식’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승만은 국민의 생활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낡은 제도들을 타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기서 그는 정치혁명뿐만 아니라 ‘문화혁명’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백성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방법은 기독교 교육을 통한 교화(敎化)였다. 그러한 신념은 미국 유학 기간(1904~1910년)에 미국 문명을 직접 체험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승만은 나라의 장래가 기독교에 있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1919년 4월 미국 기자들에게 그의 목표는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한국을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으로 옮기려는 ‘문명사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동체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동아시아적 생활방식’ 대신에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는 혁명적 변화의 시도였다.

또한 이승만은 청년시절부터 국제사회에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 특히 약소국에게는 ‘동맹외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ㆍ하버드대ㆍ프린스턴대에 다니면서 서양외교사와 국제법을 전공하게 됐다. 중립법 문제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힘 없는 국가’에게 ‘중립’은 아무 소용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므로 그는 독립 운동 방략으로 무장투쟁론과 대립되는 ‘외교독립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한민족의 힘만으로는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일본을 전쟁에서 굴복시킬 강대국의 지원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기댈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이승만에게 미국은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자 ‘영토적 야심이 없는’ 유일한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미국과 일본이 반드시 전쟁을 하게 되며 그 때가 바로 한국 독립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1941년에 뉴욕에서 출간한 "일본내막기(일본, 그 가면의 실체)에서 주장했다. 출간 후 몇 달 뒤에 진주만공격이 일어남으로써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미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행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나 광복 후에나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기본 정책은 소련과 협조해 세계문제를 해결한다는 친(親)공산주의 혹은 좌우합작(左右合作)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결국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을 지지하고 6.5전쟁을 계기로 한.미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을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가담시킨다는 이승만의 꿈도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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