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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의 의기투합, 페미니스트 카페 고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옷가게.신발가게부터 액세서리.팬시점까지…. 이대 정문에서 신촌 기차역에 이르는 길에는 볼거리가 많다.

당신이 카페 '고마' 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이런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할 것. 고마는 길 뒤편 골목에 자리잡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까. 골목에 들어서도 고마는 첫눈에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보세옷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길 한켠 작은 건물 2층에까지 시선을 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포기하지 마시길. 고마는 여느 카페와는 다르다.

1층 벽에 붙은 '페미니스트 카페 고마' 라는 안내문에 벌써 호기심이 동한다.

계단을 올라 카페 문을 열려는 차, 다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고마 알림판' - “매주 금요일 여성학자 오숙희의 '수다마당' 이 열린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엽서를 판다.

조미희 작품 전시중.” 구석구석 빈곳이 없다.

내부를 들여다 보기 전 충고 한마디. '페미니스트 = 여성전사' 로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 실망이 덜하다.

아이보리색 소파에 갈색의 나무 테이블, 곰인형.꽃다발.액자등 아기자기한 소품들, 유난히 벽이 하얗다는 점 말고는 그저 그렇다.

음악도 보통의 흥겨운 음악이 주류. 그래, 이미 말했지. 뭔가 '전위적' 일 것이라는 기대는 미리 포기하라고 말이다.

저기 좀 색다른 장면. 한쪽에 자리잡은 단출한 여성학 서적판매대. 단골을 위한 20개의 사물함. 동성애자 탄압중지를 위한 서명용지. 그렇다면 여기는 분위기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는 페미니즘 카페일까. 주인장은 세명의 여자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 선후배 사이인 이숙경 (35).정경애 (31).전인선 (30) 씨가 그들. 성폭력상담소 상담원, 대학강사등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의기투합한 것은 지난 5월이었다.

'열심히 또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 이 일을 저질렀다.

3인의 경제공동체에 대한 희망은 감추고 이대 앞에서 대안문화의 장을 펼쳐 '여성학의 메카' 를 이뤄보겠다는 꿈만 살짝 내비친 채…. 고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곰의 옛말로 단군신화의 웅녀 (熊女) - .여성성의 회복없이 민족이라는 말이 통하기나 할라고. 망설이다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말았는데 갈증을 느끼던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그 진부한 표현 '물 만난 고기' 처럼 운동가.학자.예술인.전문직 여성에 이어 동성연애자 레스비언까지 다양했다.

물론 남자의 출입금지 구역은 아니다.

객기를 부리는 남자는 '사절' 이다.

언성을 높인다거나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할 경우 3회 경고로 퇴장!

하지만 여자의 경우 그런 제약이 없다.

이 곳을 즐겨 찾는 조혜련 (24.이대 대학원) 씨의 말. “우선 편해요. 여기선 각기 다른 손님이 아니라 선후배.친구도 될 수 있거든요. 열린 공간이라고 할까요.” 맞다.

열린 공간. 여성전용 문화공간으로도 문은 열려 있다.

벌써 작고시인 고정희씨의 시낭송회, 정신대 관련 토론회, 언더그라운드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의 콘서트가 거쳐 지나갔다.

노래패 공연이 대기 중이고 12월31일에는 '페미니스트 망년회' 가 열릴 예정이다.

5년, 10년 뒤 고마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웅녀들의 해방구 또는 사랑방? 그런 거창한 얘기는 일단 유보하자. 우선은 하얀 벽이 까만 낙서의 무게로 남을테지. 그만큼 페미니즘의 의미도 진하게 살아날지 모를 일이고….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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