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점 ‘스펙’만 관리 … 엑셀파일 분석 못 하기도

중앙일보

입력 2009.03.17 00:54

업데이트 2009.03.17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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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두산그룹의 인사담당자인 오영섭 부장은 “우리는 대학 졸업자를 뽑을 때 지원서에 ‘학점란’ 자체가 없다”며 “신입사원 선발 때 인성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조선업체 인사부장 박모 부장 말도 비슷하다.

“영어 토익이나 대학 성적이 아닌 ‘성격 좋은 사람’을 뽑아 우리가 원하는 인재로 키우는 정책으로 바꿨다.”

신입사원을 그간 토익과 대학 성적 등을 중심으로 뽑고 보니 현장의 실무 능력이 너무 부족해 고심 끝에 마련한 대책이라는 설명이다. 대부분의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신입사원에 대해 ‘영어·학점은 수준급’ ‘실무 능력은 낙제점’”이라는 목소리였다.

대졸 취업자들의 경우 학점, 영어 성적, 대외 활동 등 이른바 ‘입사에 필요한 스펙’만 신경 썼지 정작 실무에 필요한 능력은 형편 없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상당 기간 업무 맡기지 못해=화학 소재 기업인 A사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정모 과장은 며칠 전 낭패를 봤다. 지난해 말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엑셀 파일로 된 월별 매출 자료를 주고 분석 보고서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영업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틀 뒤 “다 됐느냐” 고 물었을 때 그 신입사원은 “파일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답변뿐이었다. 이 신입사원은 서울의 명문 사립대 출신이다. 전자업체 인사담당자인 김모(45) 부장은 지난해 11월 신입사원 채용 면접을 진행할 때를 회고했다.

면접에 들어간 전자공학 전공자에게 회사 면접관이 전자회로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원자는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설명을 했지만 전자회로를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답변하지 못했다. 이날 면접을 본 지원자 대부분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국내 대학들이 이론을 많이 가르치고 실무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김 부장의 설명이다.

또 다른 대기업 인사담당자인 이모 부장은 “신입사원의 경우 실제 업무는 OJT(직장 내 훈련)로 가르치지만 그래도 실무 능력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며 “법적인 수습기간은 3개월이지만 실제 수습기간은 혼자 제 몫을 할 때까지를 고려하면 1년6개월 이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수습 땐 정상 월급의 절반만 주지만 3개월이 끝나면 다 주니 회사 입장에서는 이것도 신입사원 교육 비용이라고 했다.

◆‘도전성’‘협동심’ 보고 뽑아=대졸 취업 지원자 중 실무 능력을 잴 수 있는 마땅한 잣대가 없다 보니 요즘 기업들은 도전적이거나 협동심이 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뽑는 추세라고 한다. 지원자의 성격과 성향이 입사 때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중앙일보 설문조사에서도 30대 그룹 인사담당자들은 신입사원 채용 때 가장 중요한 평가항목으로 도전정신(28%)을 꼽는다고 응답했다. 조직 적응력과 협동심(27%), 창의성(22%), 도덕성(18%) 등이 뒤를 이었다. 30대 그룹 중 학점과 영어 성적을 꼽은 기업은 한 곳도 없다. 최근 기업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면접 비중을 늘리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12일부터 신입사원 채용에 들어간 삼성전자도 면접이 당락을 좌우한다. 일정 기준(학점 3.0점 이상, 토익 스피킹 4~5급)만 넘으면 더 이상 학점이나 어학 능력은 신입사원 선발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인사팀의 최주호 부장은 “도전정신, 창의성, 전문지식, 글로벌 역량이 신입사원 선발 기준”이라며 “일반 직군은 학점이나 영어 실력은 기본만 되면 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신입사원을 뽑으면 4주간 합숙을 통해 재교육을 하며 이 과정에서 신입사원은 기업 문화와 경영철학을 익히거나 봉사활동을 한다. 최 부장은 “이 교육은 학생을 기업이라는 조직 문화에 적응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며 “이공계생이 많다 보니 커뮤니케이션 기술, 경영·경제 상식 등도 교육한다”고 말했다.

한화그룹 인사팀의 이대우 부장은 “특정 회사에서 필요한 과제를 대학에 위탁하면 대학에서 그 과제를 수행했던 학생들이 그 회사로 입사하는 산학 연계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염태정·문병주 기자

대학들 “우리가 직업인 양성소냐”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이 기업 수요에 맞춘 인재만을 양성할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연세대의 김동훈 대외협력처장은 “기업체가 대학 졸업생을 뽑아 실무에 바로 투입하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대학은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처할 사고력과 문제 해결능력을 키우는 곳”이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대외협력처 백승수 과장은 “최근 취업 경쟁이 심해지면서 실용적 교육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은 것 같다”며 “학생들의 사회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말하기와 글쓰기, 토론 수업을 강화할 필요성은 있다”고 말했다.

미미하지만 일부 대학은 기업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채용 조건형 계약학과’다. 기업이 원하는 대학 커리큘럼을 짜면 기업체는 졸업생에게 취업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2008년 현재 채용 조건형 계약학과는 성균관대 반도체학과 등 3개 학교 4개 과(총 375명)다. 재교육형 계약학과는 43개 교 148개 학과 4992명 규모다. 2001년 처음 도입된 공학교육인증제(ABEEK) 도 비슷하다. 1999년 설립된 공학교육인증원이 학과 과정을 심사해 국제 수준의 공학교육 품질보증을 하는 제도다. 2008년 12월 현재 56개 대학, 485개 프로그램이 인증에 참여하며, 삼성의 17개 계열사가 인증받은 학과 졸업생에게 취업 때 가산점을 준다.

이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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