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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사업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한다…박용성 회장의 ‘백과사전 집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용성(69·일러스트) 두산그룹 회장은 18일 오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조촐한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두산의 엔싸이버 사업팀이 NHN과 ‘지식 구축 사업 확대를 위한 공동 개발 협약식’을 맺는 자리다.

엔싸이버란 두산의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www.encyber.com)다. 양측은 엔싸이버 콘텐트를 바탕으로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각종 지식 정보를 구축하고 네티즌에게 서비스한다.

두산그룹에서는 이 정도의 협약식에는 보통 상무급이 참석한다. 이 사업 부문은 연간 매출이 31억원으로 그룹 매출(23조원)의 0.01%를 겨우 넘는다. 더욱이 이번 협약은 새로운 계약도 아니고 2004년 맺은 내용의 연장 계약이다. 따라서 상무급이나 그 이하 실무선에서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박 회장이 직접 이 행사장을 가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엔싸이버의 홍진기 부장은
“지난달 중순 박회장에게 업무 협약 계약을 한다고 보고하자 ‘거기엔 내가 직접 가겠다’고 말을 해 순간 당황했다”며 “NHN 쪽에서도 박 회장의 참석에 놀라며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도 실무급이 아니라 3월 말 물러날 예정인 최휘영 대표와 김상헌 대표 내정자가 모두 참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애정 어린 사업=박 회장은 그룹 회장 직함뿐 아니라 중앙대 이사장·대한체육회 회장 등 굵직한 타이틀이 많다. 하지만 사내에서는 한때 그를 ‘엔싸이버 편집장’이라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99년 겨울 엔싸이버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작업을 할 때 박 회장은 우리들 사이에서 깐깐한 편집장으로 불렸죠. 매일 사무실에 나와 백과사전에 들어갈 내용물을 챙기고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며 CD롬에 담도록 하고….”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홍 부장의설명이다. 그만큼 박 회장이 이 사업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번 행사에 시간을 쪼개 직접 참석하는 것도 이런 애정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박 회장은 왜 돈벌이도 안 되는 이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는걸까. 엔싸이버는 96년 제작된 두산 백과사전을 2001년 웹사이트로 옮긴것이다. 두산백과사전 제작팀은 96년 해체됐다. 박 회장은 이를 항상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인터넷 시대에 백과사전 사업은 더 이상 수익을 낼 수 없어 접었지만 그 명맥은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다. 다시 팀을 구성해 웹사이트로 구축하고지식의 바로미터(기준) 역할을 할 수있도록 해라. 백과사전을 통한 정보공유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 공헌이다.”

이렇게 해서 해체 3년 만인 99년 3월께 13명으로 새 조직이 만들어졌다. DB 구축을 위해 각종 장비를 서울 천호동에 있는 그룹 연수원으로 옮겨 합숙 작업을 했다. 당시 박 회장은 50여 일의 합숙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연수원으로 출근해 개발을 독려하고 함께 작업도 했다.

홍 부장은 “당시 박 회장은 사이트를 꾸미는 일까지 세심하게 관여했다”며 “정보 수집보다 이를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찍은 사진도 제공=박 회장은 프로급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그는 수십 년간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찍은 수십만 장의 사진을 엔싸이버에 제공했다. 대기업 회장으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기회가 많았던 만큼 사진도 세계 각국의 이색 간판·음식·풍물·사람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국내 방방곡곡을 조사해 잊혀 가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 고교 시절부터 사진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박 회장은 지난해 말 자신이 직접 찍은 야생화 사진으로 2009년 달력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지방이나 해외출장을 가면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햇살에 좋을 때 사진을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한가하게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한 번은 외진 곳에 있는 비석을 촬영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개들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카메라로 후려치고 싶었지만 촬영된 사진이 아까워 카메라를 움켜쥐고 개들에게 물린 적도 있다고 한다. 2007년에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 청장 등 명사 27인과 함께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현재 엔싸이버에 게재된 박 회장이 찍은 사진은 60여 만 장에 이른다.
박 회장은 “사진은 촬영보다 촬영후 정리 작업이 더욱 난이도가 높고 고된 작업”이라며 “하지만 나 혼자 보고 알기보다는 많은 사람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지식욕구가 많은 재계 총수로 유명하다. 해외 출장 때마다 반드시 서점에 들러 신간 서적을 구매하는 습관이 있다. 특히 정보기술(IT)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을 구매해 귀국 후 그룹 내 실무 담당자에게 주거나 현지에서 e-메일을 통해 바로 책 내용을 알려 주며 일독을 권한다고 한다.

◆영업 목표가 ‘제로(0)’인 사업=엔싸이버는 지난해 3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콘텐트 개발에 투자를 많이 해 영업이익은 사실상 제로다. 올 영업이익 목표도 제로다. 박 회장이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담은 백과사전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은 수익이 아니라 사회 공헌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비용을 생각하지 말고 매출은 콘텐트 개발 비용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엔싸이버의 주 수익원은 네이버에 콘텐트를 제공하며 받은 정보 제공료다. 박 회장은 “어떤 사람은 가뜩이나 바쁜 사람이 왜 그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쓰냐고 한다”며 “하지만 정보의 보고이자 지식의 바로미터 역할을 할 수 있는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은 그 어떤 수출보다도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것이다. 그는 “인터넷 시대의 백과사전은 지식의 마지막 보루로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용의 정확성을 최우선 가치로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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