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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서역에서 헤매다]2.모래·바위·바람·멀고도 험난한 '皇泉'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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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엄청난 천둥번개였다.밤하늘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한번 번개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 방전(放電)은 공중의 티끌과 먼지 그리고 미생물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기의 징벌과도 같은 정화(淨化)였다.

땅이 넓으니 하늘도 넓다.넓은 밤하늘을 온통 번갯불과 우렛소리로 마음껏 채워 밤을 새우는 동안 땅 위의 만물은 숨죽여 벼락 맞기를 피하고 있었다.

다음날,간밤의 그 일을 통 모른다는 듯이 다시 번잡스러운 낡은 도시의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여기가 고대 세계의 중심이었던가.기독교 이후의 로마가 이전의 로마제국 판도 위에 그들의 보편성을 과시한 것처럼 고대 중국 역시 그 가없이 펼쳐나가야 할 무대가 세계였다.

당나라는 페르시아와 로마까지를 먼 이웃으로 삼아 교역이 늘어났고 불교를 통해 인도와 서역 그리고 동아시아의 한반도·일본·베트남 등지를 활짝 열어놓은 것이다.그래서 인도의 모험적인 사상가가 파미르고원을 넘고 신라와 일본의 구도승이 장안을 거쳐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 대유사(大流沙)의 고난으로 천축을 향하게 되었다.

소년승 혜초가 그의 열정을 중국과 서역,인도대륙에다 바침으로써 세계적 자아를 실현한 것도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아니,그의 밀교야말로 더 커다란 세계의 비경(秘境)이었다.

나는 하루에 5㎞ 내지 10㎞ 정도의 척박한 길을 걸어가던 옛날의 구도승을 내 순례의 유전인자로 받아들였다.

거기에는 슬픔 따위도 다 쫓아낸 굳센 외로움의 실체만이 남아있었다.때마침 인간의 육신도 쓰러지면 미이라가 되기에 알맞은 건조지대에 접어든 것이다.

나는 실크로드 기점인 옛 장안인 시안(西安)을 총총히 떠났다.시안역에서 자위관(嘉浴關)까지의 까마득한 여정에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이백의 이름으로 된 태백주(太白酒) 한병을 두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다가 그것으로 입안을 적셨다.

‘나 지금 술잔을 멈추고 달에게 묻노니’라는 그의 시를 떠올렸다.

실크로드.한자로 사로(絲路)·견로(絹路)·사주지로(絲綢之路).실크로드라는 그럴싸한 이름은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헨이 지은 것이다.이른바 비단길이다.

이 실크로드가 어지간히 뻗어나가면 1만1천5백리 만리장성 끄트머리에 자위관이 있다.

한고조 유방은 말 탄 병력이 없어서 이곳은 커녕 노상 흉노에게 쩔쩔매는 신세였다.그러던 것이 무제에 이르러 말의 확보와 함께 서역을 개척함으로써 극동의 고조선 한4군의 한 쪽 날개인 양 서역의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했다.

그 뒤로 당 태종은 그의 딸 문성공주를 티베트 라사의 황제 손첸캄포에게 시집 보내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그러지 않고서는 그 토번(吐番-티베트)의 병마 때문에 장안이 위태로울 지경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시안역을 떠난 특급열차는 시안 일대의 드넓은 평야를 지나자 심상치 않은 산세 가운데로 접어들었다.차창 밖은 웅장한 것,황막한 것만이었다.

어디 한군데 아기자기한 미모 따위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테면,청산은 먹이건만 만고의 병풍이로다 따위의 풍경으로 읊어질 수 없거니와 그야말로 만고의 비정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이 실크로드의 험로는 중국 비단이 귀중한 상품이 되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거쳐 로마와 바그다드로 실려가는 일만을 맡은 것이 아니다.

끝간데 모르게 이어지는 길의 도중 어느 역참(驛站)의 국제시장에서도 실크 자체가 화폐 역할을 했던 것이다.그래서 비단폭이 아주 짧게 잘라지는 일도 많았다.

심지어 로마시장에서는 중국비단과 은(銀)의 무게가 맞먹는 거래였던 것이다.중국에서 돈을 전백(錢帛),재백(財帛)으로 말하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과연 이 길은 대상(隊商)의 길이다.아프리카 사막의 단봉낙타와는 달리 서역의 낙타는 쌍봉이다.

사막의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낙조를 배경으로 서 있는 낙타의 이미지는 더없이 체념적이다.하지만 낙타만치 사나운 짐승도 없을지 모른다.어느 때는 사람을 물어뜯고 어느 때는 마구 밟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대상의 길은 영혼적인 길이 아니라 지극히 가혹한 세속 생존의 길이다.시안의 기점에 설치한 조형물에서 아랍인 안내자는 8척 장신의 역사(力士)였다.

사막의 무장강도나 맹수와 모래폭풍을 만나서 이겨내야 한다.무엇보다 그런 힘찬 사람이어야 낙타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거느리는 야성으로 그 죽음의 길 실크로드의 여행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산시성 간쑤성에 해당하는 내륙 깊숙한 산악지대는 진작 인간적인 어떤 상태도 거절하는 의지로 이루어졌다.인간에 대한 자연이라는 개념도 거기에는 없다.

‘자연’이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불교의 ‘자연 그대로인 세상(自然法爾)’이나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는 또 다른 피동적인 것을 이제까지 자연이라고 말해온 인간이라면 응당 뉘우치지 않으면 안된다.

고도 3천m의 협곡을 한나절쯤 달리다가 만나는 고원지대의 그 막막한 곳이 유목의 세상인 것이다.낙타가 뜯어먹는 풀을 낙타초,소소초라 한다.그것을 사막의 보배라고도 한다.

자갈이나 굵은 모래로 된 그 황량한 사막에서 낙타 혓바닥이 피투성이가 될 만큼 사나운 풀이었다.

시안을 떠나 웨이수이(渭水)를 만나는 곳이 옛사람들이 서역으로 떠나는 친지를 전송하는 곳이다.서역은 황천길이기도 했다.그래서 웨이수이의 물은 그야말로 황천(黃泉)의 누런 탁류이기도 한가.

“떠오르는 흙먼지 막으며/주막 앞 버드나무 빛깔은/푸른 앞길을 수놓는데/떠나는 그대 한잔 더 비우게나/이제 서쪽 양관을 넘게 되면/함께 마실 벗도 없으리니”

이것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노래이거니와 서역길의 절망이 여실하다.

열차는 홍산협(紅山峽)의 무시무시한 수직비탈에 바짝 늘어붙어서 황하 중류를 내려다보고 있다.

유교의 사상(仁)도 유교 미술에서 말하는 본바탕(素)도 예악(禮樂)도 그것이 이런 고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들의 농경취락지인 중원의 산물일 뿐임에 틀림없다.

산악과 사막에서는 그런 인간의 규범들은 거의 무효였다.

아니 시안 교외에 있는 욕심 많은 진시황제릉의 산이나 병마 토용(土俑)의 군단과 함께 역대 왕조의 야망으로 점철된 서역 경영도 이곳 내륙에 방치된 유목생활에서는 한갖 덧없는 수작에 불과했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천연의 본능만이 삶을 규정한다.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르면 얼마나 다른 것인가라는 냉랭한 질문이 있어도 거기에 대들만한 대답이 궁하다.

열차는 목 쉰 기적소리도 내지 않고 가고 또 갔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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