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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야 실력 는다? 구제불능 감독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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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대학농구 지도자들은 선수의 기량을 빨리 향상시킨다며 구타를 필요악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구타는 폭력으로서 범죄행위일 뿐이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지난달 14일 인터넷 UCC(사용자제작콘텐트) 사이트에 H대학 K감독이 경기 도중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구타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 동영상에는 K감독이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양 주먹으로 복싱하듯 선수들을 마구 때리다가 발길질까지 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파문이 일었지만 정작 농구계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H대학 선수들은 감독에게 연신 복부를 맞고 쓰러지면서도 “죄송합니다”고 말했다. K감독은 감정이 폭발한 듯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11월에 열린 농구대잔치 대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해당 대학의 감독은 동영상이 인터넷과 각종 미디어에 공개돼 떠들썩한데도 “전반에 크게 져서 선수들을 독려한 것뿐이었다”며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대응했다.

대학농구연맹은 이 감독에게 자격정지 1년의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그나마 이 처벌도 해당 학교의 또 다른 폭력 동영상이 한 번 더 공개된 뒤에야 이뤄졌다. 대한체육회 선수보호위원회 제10조 징계 규정에 따르면 지도자의 폭력에 대해서는 1차로 5년 이상의 자격정지를 내리게 돼 있다. 2차로 적발되면 10년 이상의 자격정지 및 영구제명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연맹은 1년 자격정지라는 솜방망이 처벌에 대해 “정년퇴직이 가까운 감독이라서 1년 자격정지는 5년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K감독은 결국 지난 4일 학교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동안 대학농구 지도자들의 폭력 사건이 외부로 알려져 문제가 된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 UCC가 공개된 후 여론에 떠밀려 해당 감독이 사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동영상을 접한 이들은 “성인이 된 선수들을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때리는 게 한국 학원스포츠의 현주소”라며 착잡해했다.

하지만 정작 농구계에서는 비인간적인 구타 장면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꼭 이런 말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H대학이 저 경기에서 전반에 지다가 하프타임에 감독이 때리니까 결국 역전승했다면서?”라는 말이다. 때려서라도 이기면 감독은 곧바로 면죄부를 받는 게 현실인가. 한국의 스포츠 지도자들은 왜 때리고, 선수들은 왜 맞으면서 운동할까.
 
하프타임 때 감독이 때린 뒤 역전승?
대학농구에서는 구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지난해에는 Y대학에서 훈련 중 심하게 맞은 선수가 구급차에 실려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Y대학 감독은 당시 “내가 때린 게 아니라 코치가 때렸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고, 여전히 이 대학 감독을 맡고 있다.

2000년에는 영맨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이 모 대학팀과 연습경기를 하던 중 대학 감독이 취재진이 있는 앞에서 선수들을 구타했다. 이 장면이 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나가면서 이슈가 된 적도 있다. 당시 문제가 됐던 감독들은 현재 대학농구연맹의 임원을 맡고 있다. 사실 대학농구연맹의 임원 대부분이 폭력 사건으로 구설에 오르내렸던 장본인이다.

2005년에는 S대 농구부 감독이 성적 부진과 만성적인 폭력 등을 이유로 해임된 적이 있다. 프로팀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대학농구의 폭력은 위험수위다. 프로팀의 한 감독은 “대학팀과 연습경기를 하는데 상대팀 감독이 경기 도중 선수들을 벤치로 불러내 무자비하게 때리더라. 행여나 외국인 선수들이 이 모습을 보고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알까 봐 내가 앞을 막아서고 작전 지시를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 관계자는 “모 대학 감독은 선수들을 각목으로 때리더라. 그렇게 맞고도 곧바로 다시 나가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 이건 감독이 아니라 ‘고문 기술자’로 불러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삼천포여중·고의 코치는 선수를 때려 해임됐고, 12월에는 펜싱 국가대표팀 코치가 전지훈련 도중 선수를 구타했다는 이유로 무기한 자격정지를 받았다.

그래도 대학농구는 여전히 폭력에 관대하다. 해당 대학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폭행 사건이 일어난 Y대는 “증거가 될 만한 동영상이 없다”며 해당 감독을 전혀 징계하지 않았고, 이번에 동영상이 공개돼 문제가 된 H대학은 해당 감독이 사표를 내기 전 3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구타는 마약과 같다
프로농구 KCC의 허재 감독과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의 이호근 감독은 모두 아들을 농구선수로 키우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감독으로서 때리는 건 잘못”이라면서도 학부모로서는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가 맞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단, 여기에는 전제가 붙었다. “운동이나 생활 태도에서 잘못된 점이 있을 때 따끔하게 야단치느라 때리는 건 괜찮다. 하지만 학생이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지도자가 자기 분을 참지 못해 때리는 경우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도자가 제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러선 안 된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왜 지도자들은 폭력의 유혹을 받을까. 연세대 코치 경력이 있는 프로농구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은 대학농구 폭력에 대해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선수들의 기량을 빨리 키우기 위해 손을 대는 마약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자가 절대로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서 “대학은 프로와 다르다. 프로에서는 선수 기량이 흡족하지 않을 때 안 쓰면 그만이다. 선수의 기량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은 단 4년 안에 뭔가 발전한 모습을 보여야만 학생이 취업할 수 있으니까 급한 마음에 폭력을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남기 남자농구대표팀 감독은 “중·고 지도자들은 대학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다 보니 조급해지는 게 문제다. 폭력을 써서라도 당장 성적을 내지 못하면 자리가 불안하다”면서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폭력에 길들여진다”고 말했다.
 
지도자가 변해야 산다
대학 감독 출신의 한 지도자는 “대학팀에 있을 때는 고교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뛰어 다니느라 밤 11시 이전에 퇴근해 본 적이 없었다. 지도법을 개발하는 것보다 스카우트 잘하는 것으로 감독 능력을 평가받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스카우트 잘하고, 폭력을 써서라도 성적을 끌어올리면 ‘평생 직장’ 교수직까지 보장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일부 대학 감독이 지도자의 본분을 잊을 수 있는 환경도 문제다.
결국 지도자가 변해야 학원 스포츠에서 폭력이 사라진다. 대학농구 폭력 사태를 지켜본 농구인들은 “농구에서도 지도자를 키우는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프로나 대학팀의 코치 자리를 보장받은 일부 스타 플레이어 외에는 대부분이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제대로 된 지도자 수업을 받을 길조차 없다.

스포츠 선진국 가운데 한국처럼 막 현역에서 은퇴한 코치가 자격증도 없이 선수를 가르치는 나라는 드물다. 사회체육의 천국 독일에서는 아무리 수퍼스타라도 공인된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자격시험에 통과해야 코치가 될 수 있다. 독일축구 스타 프란츠 베켄바워도 자격증이 없어서 대표팀을 맡았을 때 감독이나 코치라는 명칭 대신 치프라는 용어를 만들어 썼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꾸준히 무자격 코치가 나오고, 이들이 선수를 가르쳐 진학과 취업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경험 많고 실력이 검증된 지도자는 프로에, 경험 적은 지도자가 초·중·고에 몰려 질적으로 역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KBL이나 농구협회가 나서서 지도자 양성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역 감독 시절 우승제조기로 명성을 떨친 방열 전 경원대 교수는 “지도자의 구타나 체벌은 결국 경기나 훈련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선수에게 전가하는 것으로서 비교육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라고 잘라 말했다.

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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