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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서예계]上. 개성없는 공모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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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최신 컴퓨터 모뎀의 전송속도는 초당 5만5천6백바이트. 한 글자가 보통 2바이트라면 이론상으론 일초에 2만7천8백자의 정보를 처리할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초스피드로 방대한 양의 정보가 오가는 시대가 바로 디지털 시대다.

그런데 손으로 쓰는 서예는 어떤가.

공모전이 열릴 때마다 끊임없는 모작시비와 개성부재라는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다.

또 일반과는 동떨어진 채 서예계 울타리 안에서만 맴도는 현실은 서예인들조차 서예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디지털 시대에 서예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폐쇄적인 서예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미래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유명한 중국시인 도연명의 '음주 (飮酒)' 는 '시골에 집을 마련하니/차마 (車馬) 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로 시작한다.

이 시에는 '국화를 동편 울타리에서 꺾어들고/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는 유명한 귀절이 나온다.

바로 이 시가 서예 공모전 출품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시다.

중견서예가 전윤성씨는 93년에 쓴 논문에서 1982년부터 93년까지 미협 서예대전의 특선 이상 작품 2백98점을 분석, 매년 이 시를 쓴 작품이 출품돼 입선, 수상했다고 밝혔다.

공모전 출품작은 중복되는 글자가 적을수록 좋아, 흔히 시가 서사 (書事) 대상이 되어왔다.

도연명의 '음주' 외에도 두보의 '춘야희우 (春夜喜雨)' , 최치원의 '등윤주자화사상방 (登潤州慈和寺上房) , 이백의 '왕우군 (王右軍)' 같은 시가 단골이었다는 분석이다.

가로 70㎝ 세로 2백㎝라는 서예대전 규격 사이즈에 쓰여진 이 시들은 '천편일률적이고 개성이 없다' 라는 공모전 비판의 한가지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비판은 글씨체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중견서예가 김세호씨는 "과거 10년간 서예 공모전에 가본 일이 없다" 고 잘라 말한다.

거의 같은 내용을 비슷비슷한 글씨체로 쓴데서 아무런 개성도 찾을 수 없다는게 그 이유다.

서예 공모전은 미술 공모전과는 심사의 기준이 조금 다르다.

참신한 작가를 찾는다는 원론은 같을지 몰라도 서예의 경우는 개성보다 충실한 수련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현재 미협과 서예협회, 서가협회로 삼분된 서예단체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에서 가장 강조되는 대목이 임서 (臨書) 능력이다.

본래 임서는 명필의 글씨를 베껴쓰면서 수련을 쌓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개성이 끼어들거나 발휘될 여지는 그만큼 적다.

따라서 요즘 공모전에서 말하는 개성은 글자의 조합능력 정도이다.

말하자면 임서한 글자를 조합해 도연명이나 두보의 시를 써보이는 능력이 개성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서예계에는 '체본에서 시작해 체본으로 끝난다' 는 말이 있다.

이는 조합능력이 없는 서예가 지망생에게 수련용으로 써준 체본 (體本) 이 실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빗댄 것이다.

수련용 체본이지만 이것을 익혀 그대로 공모전에 출품, 입선과 수상을 따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체본의 위력이 큰게 현실인 것이다.

현재 전국학원연합회에 등록된 서예학원은 8백43개. 하지만 연구실이란 이름으로 수강생을 받고 있는 개인 서실의 숫자는 8천개 이상인 것으로 전한다.

또 서예계에서 흔히 기성작가로 인정받는 초대작가의 수는 3개단체에서 4백59명이다.

이처럼 서예가가 많아도 서예계에는 시장이 없다.

이런 현실에서 서예인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이 서실 운영이 될 수밖에 없다.

서예활동과 공모전 출품 그리고 서실 운영이 고리처럼 엇물려 있고 그런 관계속에서 잡음이 빗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전당 서예관 노상동 차장은 "서예교육에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현재 법첩을 베끼는 임서 중심에서 개성을 발휘할수 있는 과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견서예가 전종우씨는 개성과 관련해 "전서 (篆書) 부터 공부를 하면 해서 (楷書) 로 공부가 끝난다.

행서 (行書) 를 쓰기가 어렵다.

그러나 해서부터 공부하면 행서를 쓸 수 있다" 고 말한다.

국내 서실의 많은 곳에서 전서에서부터 스타트하고 있다.

한나라 예서 (隷書) 나 고전 (古篆) 이 서예공부의 기본이라고 주장한 추사 이래 이는 전통이 되다시피해 왔다.

그러나 전서보다는 행서, 행서보다는 초서 (草書)가 개성을 표출하기 쉽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서예협회 김호근 사무국장은 "서예계 통합이란 외적 변화가 선행되야 한다" 고 말한다.

만일 3개 단체가 통합돼 공모전을 운영한다면 스승과 제자 관계보다는 실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기준이 저절로 생길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다음회는 '화랑이 외면하는 서예작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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