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공개된 정조의 비밀서신 299통을 영인·탈초·번역·주해하는 작업이 숨가쁘다. 서신의 내용 전체 공개는 다음달 말로 예정돼 있다. 본지는 ‘정조대왕 서간문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서찰의 주요 내용을 원문과 함께 소개한다. ▶안대회(성균관대 한문과 교수)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박철상(고문헌 연구가) ▶백승호(서울대) ▶장유승(서울대)씨의 도움을 받았다. 정조의 통치 스타일을 6개의 키워드로 분류했다.
공개된 정조 어찰 원문과 해설
무대 뒤 정치
● 실록 뒤의 연출가
내일 신하들을 소견할 것인데, 반열에서 나와서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그러면 일의 형세를 보아 정승의 직임을 면해주든지 견책하여 파직하든지 처분할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임명하는 방법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라. (1799년 3월 6일)
(明日當召見諸臣矣, 出班力陳, 仍卽下庭免冠請譴, 則當觀事勢, 免相與譴罷間區處, 其後復拜之道, 自有料量者, 依此運意)
해설 1799년 3월 4일 정조는 화완옹주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린다. 화완옹주는 정조의 고모지만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원수’다. 정조의 처분에 신료들이 일어나 반대한다. 정조는 3월 6일자 편지에서 심환지에게 자신의 처분에 강력히 반대하라고 지시한다. 무대 뒤의 연출가가 된 것이다. 행동선까지 알려준다. 아뢴 뒤 뜰로 내려가 관을 벗으라는 구체적인 ‘지문’까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임명하는 방안을 구상해 놓았으니 파직할 것임을 알린다. 실제로 정조실록 3월 7일자 기사에서 심환지는 완벽하게 대본대로 행동했다. 사직의 뜻을 아뢰고 섬돌 아래 엎드려 관을 벗은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그 자리에서 심환지를 파직했다. 실록이 하나의 완벽한 연극이 되는 장면이다.
● 상소문 ‘받아쓰기’를 시키다
정리곡은 피곡(皮穀)이다. 봄에 한 알 흩어주어 가을에 만 알이 익도록 하겠다는 지극하고 성대한 뜻은 미천한 사물도 감동시킬만하다. 그런데 어떤 관리가 이처럼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일을 하는가. 자애로운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 설치한 본뜻이 뒤집혀 도리어 원망을 부르는 단서가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찌 심히 분통스럽지 않겠는가. (1797년 10월 5일)
(整理穀則皮穀也, 春散一粒, 秋熟萬顆之至意盛念, 可感豚魚, 則何物官吏, 有此憑公營私之擧, 慈惠之遍敷, 設施之本意新反, 反爲招怨之端, 思之及此, 豈不憤痛之甚耶. )
해설 ‘정리곡’은 농사를 앞두고 백성에게 봄에 곡식이나 돈을 빌려줘 추수 뒤에 갚게 하는 일종의 국가 보증 신용기금이다. ‘저리 융자’의 구휼제도가 탐관오리들에 의해 ‘고리대금’으로 변질되자 정조가 분개했다. 다음날 편지에서 정조는 정리곡 폐단을 지적하라고 지시한다. 정조실록(1797년 10월 7일)에 보면 정조가 심환지의 문제제기를 칭찬하며 시정조치를 내린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상소문 ‘받아쓰기’까지 지시할 정도였다.
● ‘뒷담화’를 할지언정 예우는 갖춘다
(원문 미공개) 대사헌 송환기(宋煥箕)의 상소 초본은 야사립(野絲笠)이라 하겠다. 대저 그 사람은 지난날 시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론이 엄격하지 않고 처사도 성실하지 않으니, 그의 입에서 나왔다면 만 줄이나 천 편의 글을 내놓아도 세도(世道)에 무슨 보탬이 되겠으며 대의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797년 1월 27일)
해설 송환기(1728~1807)는 우암 송시열의 5대손이다. 정조 20년(1796년) 12월, 임금은 송환기를 원자(元子·훗날의 순조)의 사부에 임명하고 개강례(開講禮)를 청한다. 정조실록에는 “경(=송환기)이 지금 선조의 뒤를 이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를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기록돼 있다. 숙종의 사부였던 송시열의 후예로서 예우한 것이다. 하지만 송환기는 사직소를 올려 정조를 애타게 한다. 이 와중에서 정조는 송환기를 비방한 것이다. 정조는 산림(재야의 선비)을 원자의 사부로 임명해 예우했지만, 그들을 정치적 실세로 인정하진 않았던 것 같다.

공작의 정치
● 정조, 벽파를 “우리 당(吾黨)”이라 부르다
요사이 벽파(僻牌)가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한다. 안은 텅 비었는데 밖은 차 있는 것에 비한다면 그 이해와 득실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한 뒤라야 ‘우리 당’의 광사(狂士)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들이 ‘뒤죽박죽’일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1797년 4월 11일)
(近來僻牌見落之說, 頗盛行云. 比之內虛外實, 其利害得失, 果何如? 且如是然後, 吾黨之狂士可得.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5635><5635>, 也是不妨, 可以領會耶?)
해설 지금까지 역사는 강경 보수 세력인 노론 벽파를 정조 개혁 정치의 가장 적대적 세력으로 평가해 왔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정조는 벽파의 지지부진(유명해진 한글 단어 ‘뒤쥭박쥭’이 여기서 나왔다)을 탓하며 분발을 촉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벽파를 ‘우리 당(吾黨)’으로까지 칭한다. ‘광사(狂士)’란 ‘혈기 넘치는 젊은 선비들’을 말한다. 정조의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벽파의 영수 심환지를 포섭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을까.
● 심환지를 위로하다
경은 자기편에서도 경시당하고, 소론에게 거슬리며, 남인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위로나 아래로나 모두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늘 한밤중에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안타까워진다. (중략) 벽파는 다른 장점이 없고 남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힘껏 말하고 통렬히 배척하는 것뿐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후로는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의논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때마다 곧장 말하도록 어용겸(魚用謙)과 상의하여 하나의 규범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1798년 3월 27일 추정)
(卿則不暴見輕於自中一邊, <5FE4>於少, 嫉於午, 若此不已, 竊恐上下寺(專<5094>)不及, 每中夜以思, 不覺爲之悶然 (중략) 僻牌無他長, 見人不是處, 輒力言痛斥, 而今則不然, 此後凡於不是處, 不待往復, 隨卽言之事, 魚許亦爲相議, 以爲一副當規模如何. )
해설 정조가 ”불의를 보면 통렬히 배척하는 것”을 벽파의 장점으로 평가하는 글이다. 앞으론 일일이 자신과 의논할 것 없이 즉시 말하라며 심환지를 격려하고 있다. 정조는 심환지와 어용겸을 중심으로 불의를 준엄하게 배척하는 벽파를 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정조, ‘첩자’를 심다
어제 이조판서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의 뜻은 순전히 개과천선하는 것이다. (중략) 부디 이러한 뜻을 알고서 신경 써서 대하고, 도와주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중략) 외인(外人)이나 이조판서와 절친한 인척조차도 모두 시파로 알고 있으니, 정사를 행할 때도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러한 때 정도(正道)로 돌아온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1797년 7월 17일)
(昨見吏判, 有許多酬酢, 而其意純是遷善也向善也. (중략) 須知此意, 加意待之, 無孤來蘇之望爲可耳. (중략) 外人與吏判切姻, 亦皆以時輩知之, 行政亦當如是云云. 其所歸正於此際, 甚幸. )
해설 여기서 이조판서는 민종현(閔鍾顯)이다. 정조는 그가 ‘개과천선’해서 ‘정도로 돌아왔다’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민종현의 이러한 ‘전향’을 인척들도 모른 채 ‘시파’로 생각하고 있으니 공식석상에서는 (전향 사실을) 밝히지 말고 시파로 대하라는 것이다. 정조의 ‘스파이 정치’였을까. 아니면 심환지를 교란하기 위한 ‘이중첩자’였을까. 문맥을 따르면, 정조가 심환지의 벽파를 ‘정도(正道)’로 평가하는 점이 주목된다.
분노의 정치
● 분을 삭이지 못해 밤을 지새우다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김매순이 감히 선현을 모욕하여 붓 끝에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제멋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둔다면 조정에 어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1799년 11월 22일)
(又若金邁淳口尙乳臭者, 敢侮昔賢, 登諸筆端, 萬一一任其容易, 則其可曰朝廷有長老乎? )
이른바 김매순이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跋文)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리고자 한다. 정말 망령된 일이라. (1799년 11월 23일 아침)
(所謂金邁淳之乳口腥臭, 未有人形者, 金履永之浮雜撓攘, 不識東西者, 以書以跋, 敢欲容喙於前輩議論者, 固妄矣. )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새벽 3~5시)이 지났다. 나의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보고 난 뒤에는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1799년 11월 24일 아침)
(夜間何候, 此中憤憤於近來漢所爲, 夜<6406>此草, 幾至五更後. 吾之性度, 亦可謂別異, 還可呵也. 覽後, 須勿煩人, 如何如何? )
해설 1799년 11월 22일부터 며칠 새 정조는 분노로 폭주한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당시 정조가 호론(湖論)의 대부 한원진을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려 하자, 김매순(1776~1840) 등 낙론(洛論)의 젊은 후학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격노한 것이다. 정조 본인도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새벽에 풀이 꺾여 “내 성품도 별나다”고 자책한다. 편지를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라며 머쓱해 할 정도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대표적인 논쟁이다. 인성(人性)-물성(物性) 동일성 여부를 놓고 벌어진 철학 논쟁이다. 동일하다고 본 이들이 주로 한양에 살고 있어 ‘낙론’이라 했고, 다르다고 본 이들은 충청도에 몰려 있어 ‘호론’이라 했다. 충청도 민심에 신경을 썼던 정조가 호론의 대부를 예우하자 낙론 측이 격렬히 반발했던 것이다. 이 문제만을 놓고 정조는 심환지에게 10차례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실록은 간단한 찬반 의견만 기록할 뿐 물밑의 저 도저한 분노와 긴장감을 담지 않고 있다. 당시 김매순은 불과 23세의 신진 관료였다. 훗날 19세기 유학과 문학의 종장이 되는 거물이다. 국왕의 욕을 친히 먹을 만큼 젊은 시절부터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고나 할까.
● 선비라는 것들의 의리가 고작 이 따위냐
(김종수가 죽어) 두호(斗湖)로 영구를 옮길 때 한 사람도 와서 보는 이가 없었다. 이른바 사류(士類)라는 것들의 모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도 모르게 팔뚝을 걷어붙이게 된다. (1799년 1월 20일?)
(移柩斗湖時, 無一往見者云, 所謂士流貌樣, 故至如彼, 使人不覺振腕. )
해설 1799년 초 전국적인 전염병이 돌아 12만 명 이상이 죽었다. 노론의 영수 김종수(金鍾秀·1728~1799)와 남인의 지도자 채제공(蔡濟恭·1720~1799) 등 명재상들의 잇따른 죽음도 이때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의기(義氣)로 뭉쳐 당파를 짓고 몰려다니던 선비들이 정작 노론 영수의 운구 행렬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괴질의 전염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신권(臣權)을 내세워 질리도록 왕권(王權)을 견제하던 사류(士類)들의 용렬한 행태가 가소로웠던 것일까. 저도 모르게 팔뚝을 걷어붙일 만큼 정조가 ‘뿔났다’.
보안의 정치
● 네 수하의 사람도 조심하라
나의 하예(下隸)는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할 것 같아 낮에는 과연 보내기 어렵다. 이후로는 이러한 사정을 알고 그대의 겸인(<5094>人)을 자주 보내도록 하라. 그런데 겸인 중에 잡류(雜流)가 많다 하니, 솎아낼 방도를 생각하여 더욱 치밀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떠한가. (1798년 11월 18일)
(此中下隸, 恐煩耳目, 晝則果難, 後必知此, 頻送貴<5094>, 而聞<5094>屬多雜類云, 須思澄汰之方, 益存縝密之工, 如何如何. )
해설 정조는 심환지와의 서신 거래를 극도의 비밀에 부치려 했다. 그렇다면 밀서의 전달꾼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편지의 ‘메신저’는 누구였을까. 처음엔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심부름꾼 정원사령(政院使令)이 맡았던 것 같다. 승정원 사령은 국왕의 손발이 돼야 했기 때문에 신수가 훤칠하고 글을 아는 이들이 세습해서 맡았다. 이들은 사령의 옷도 입지 않고 궁을 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환지의 지위가 높아지자 남의 눈에 띌 것이 염려됐다. 정조는 심환지의 겸인(<5094>人·청지기)을 보내라 한다. 그러면서 집안의 심부름꾼도 조심해서 고르라는 당부다.
● 집안 사람도 조심하라
이 편지는 보는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하라. 매양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는데, 비록 집안에서라도 혹시 조심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중략) 이런 서찰은 경이 스스로 세초할 것인가, 아니면 경의 아들을 시켜 세초할 것인가. 처리할 방법을 듣고 싶으니 나중 편지에 반드시 한번 언급하여 이 의심을 풀어주기 바란다. (1797년 7월 7일)
(此紙, 覽則<626F>去或洗去, 而每每一念常在於雖於家間恐或不愼. (중략) 此等書札, 卿自洗去耶, 抑使卿子洗之耶? 願聞區處之方, 後便必一示之, 以破此疑也.)
해설 정조는 계속해서 보안을 당부한다. 심환지가 서신 내용을 다른 곳에 흘리자 “생각 없는 늙은이” “입조심하라”며 인신공격까지 한다. 정조는 ▶불에 태워라(此紙卽卽丙之), ▶찢어버려라(此紙卽<626F>之) ▶보는 즉시 찢어버려라(覽卽<626F>去) ▶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此紙覽後卽<626F>之, 切勿暫留) 등 여러 차례 ‘철통보안’을 강조했다. 심환지 집안 사람까지 의심했다. 그런데 심환지는 왕명을 감히 어떻게 거역했을까. 결정적 시기에 벽파의 ‘히든 카드’로 쓰기 위해 비장했을까. 벽파가 선왕의 정통성을 계승한 당파라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성궤’와도 같은 문서였다. 정순왕후 사후 병인경화(丙寅更化·1806년)로 몰락하는 벽파도 이 ‘히든 카드’를 쓰지 않았다. 결국 심환지 외에는 이 서한의 존재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정조는 어땠을까. 전문가들은 “아마 정조도 심환지가 편지를 없애지 않을 것을 짐작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스킨십 정치
● 경처럼 훌륭한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안화(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1798년 7월 8일)
(數日阻信之餘, 承慰萬萬, 此中時樣不入眼, 事事徒令人心火自發, 火屬心, 從以眼花苦無差意, 切悶. )
해설 안화(眼花)는 눈앞에 불똥 같은 것이 어른어른거리는 병이다. 호학(好學)의 독서가(讀書家) 정조에겐 가장 괴로운 병이겠다. 정조는 자신이 죽기 2년 전부터 ‘마음 속의 불길’을 염려한다.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다. 국왕의 병세는 일급 국가기밀이다. 이를 털어놓을 정도로 정조는 심환지에게 과감한 ‘스킨십 정치’를 했다. 정조는 다른 편지에서 심환지에게 “10년을 불우하게 지냈는데도 굳게 참으며 궁색한 생활을 견뎠고, 요직에 올랐을 때도 포의(布衣) 때의 옛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며 “경처럼 훌륭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극찬한 바 있다. 실제로 정조는 심환지의 의론보다 청렴한 사람됨을 높이 샀다고 한다.
● 궁에서도 몰랐던 투병 사실을 털어놓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 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를 높이고자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榻敎)를 써 주었다. (중략) 이 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 (1800년 6월 15일)
(盖於坐邊常置藥籠, 隨意煎喫, 昨日則以人皆知之, 不得已欲尊體貌, 書出湯劑榻敎. (중략) 此外長喫照氷之水, 與貼背於冷<5817>張板上轉側者, 皆可悶.)
해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서거 13일 전이다. 2년 전에 고백했던 ‘마음 속 불길’은 더 번졌다. 왕은 여름 내내 차가운 약제로 뱃속의 화기(火氣)를 다스린다. 그것도 몰래 스스로 약을 달여 먹었다고 고백한다. 이를 들키자 어쩔 수 없이 탕제를 내라는 공식 명령을 내린다. 국왕의 마지막 날들이 의연하다.
●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다
(원문 미공개)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은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러했던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보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편지)을 받을 수 있겠는가?(1797년 6월 27일)
해설 잘못 읽으면 고려 말 공민왕의 남색(男色)을 가정한 영화 ‘쌍화점’의 애틋한 한 대목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벽파 포섭의 노련한 정치공작이라 하기에는 심환지 개인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 실수 감싸는 호방한 리더십
편지는 잘 받았다. 돈녕부 참봉과 선공감 가감역에 관한 일을 듣고서 배를 잡고 웃었다. 지금 패초하였다면 다시 부르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내일 패초한다면 상소하여 사실을 밝히는 것이 어떠한가. (1797년 12월 22일)
(承慰. 敦參將作事, 聞來. 令人捧腹, 今已出牌, 待. 更召, 或明日出牌, 上疏首實 如何. )
해설 어렵사리 이조판서에 오른 심환지가 부임 며칠도 되지 않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돈녕부 참봉을 3배수 추천할 때 김기서(金基敍)란 인물의 이름에서 ‘기(基)’를 ‘기(箕)’로 잘못 쓴 채로 낙점을 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김기서는 임명을 받고도 감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사전에 심환지가 이를 실토하자 정조는 호탕하게 ‘배를 잡고 웃었다(令人捧腹)’. 걱정 말라는 이야기다. 심환지는 정조의 지시대로 다음날 공식 보고를 했고 별다른 처벌은 없었다.
탕평의 정치
● 여론을 살피다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잘 되었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퇴근한 뒤로 잘 있었는가. 여론을 대략 들어보니 시파와 소론은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간혹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무관들조차도 놀랍다고 하며 입을 모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매우 다행이다. 남인들은 초사(初仕)를 얻지 못한 것을 자못 불만스러워 한다는데, 차후에 김성일의 자손을 거두어 써서 크나큰 비난을 막는 것이 어떠한가. 감역(監役)을 소론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또 무슨 욕을 먹겠는가. 하하. 이만 줄인다. (1797년 12월 21일 저녁)
(大政順成, 甚幸, 而公退安勝耶. 略聞物情, 時與少頗不以爲非之, 或有稱道者, 而甚至武弁, 無不叫奇, 一辭譽之云, 何幸何幸, 午人初仕之不得爲頗憤鬱云, 此後金誠一子孫收用, 以塞如屋之謗, 如何如何, 監役如不歸之少論, 又將喫得如何辱說耶, 呵呵, 姑此.)
해설 ‘도목정사’란 관리를 신규 임용하고 인사고과를 통해 이동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시기가 연말이면 ‘대정(大政)’이라 한다. 정조는 심환지와 인사 리스트까지 교환해 가며 물밑 논의를 계속했다. 연말 인사에 대해 당파들 간에 여론이 나쁘지 않자 정조도 기분이 좋다. ‘하하(呵呵)’ 웃는다. 정조는 심환지와의 편지에서 특히 여론의 동향에 신경을 썼다.
● 정적을 예우하라
채상(蔡相·채제공) 집에는 조문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 있을 적에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는데, 죽고 나서 조문 한번 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이 아니다. 더구나 조정의 체통도 이러해야 할 것이라. (1799년 10월 14일)
(蔡相家往<5501>不可不爲, 生時坐於一席而言笑, 身後不爲一問, 萬萬非其情, 且朝體尤當若此耳. )
해설 정조 시대는 ‘개혁파 채제공 대(對) 수구파 심환지’의 싸움으로 그려져 왔다. 1799년의 전국적 역병에 의해 채제공이 뜻하지 않게 숨을 거두고 이듬해 정조마저 서거하자 조선의 개혁이 끝내 좌절돼 구한말 망국으로까지 이어진 비운의 역사가 됐다는 해석이다. 이번에 공개된 정조의 비밀 서한이 이런 해석을 한꺼번에 뒤집어엎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정조에게 적대적이기만 했다는 노론 벽파에 대한 기존 해석이 잘못됐음은 분명하다. 채제공이 사망한 날, 정조는 “채상이 죽었으니 텅 비어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1799년 1월 18일)며 애도한다. 그런 채제공의 집에 심환지가 조문할 것을 요구한다. 채제공 사망 아홉 달 뒤에 보낸 편지니까 단순한 상가 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정조는 탕평을 외쳤다. 정치적 탕평의 내면에는 인간적 ‘정(情)’이 깔려 있었던 것일까.
● 마음속에 남은 것은 백성의 일
나는 조금 나아졌고 앞으로 더욱 나아질 것이다.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 (1799년 1월 20일)
(此中稍勝, 後愈勝, 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 其苦何可言? )
독서에 골몰해 창 밖의 일은 전혀 모르지만, 다만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백성의 일이다. (1797년 10월 24일)
(窓外事都不知之, 所耿耿在中者, 民事也. )
해설 정조의 서신 정치에서 드러난 냉혹하고 때론 기만적인 정객의 모습에 실망했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탕평정치는 양반 관료 당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18세기 조선에는 ‘백성을 걱정하며 밤새 침상을 맴도는 군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정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