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새하얀 세상을 걸었다. 어린 아이처럼 마냥 즐거웠다. 눈 내린 다음날 강원도 강릉 안반덕에서. [조용철 기자]
겨울철 국민 관광지를 피하고 눈을 만끽할 만한 곳을 수배했다. 겨울 산행의 재미마저 느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그 기준으로 두 코스를 찾아냈다. 하나는 강원도 태백과 삼척을 가르는 귀네미골이고, 다른 하나는 강원도 평창과 강릉의 경계를 이루는 피덕령이다. 두 코스엔 공통점이 여럿 있다.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이고, 정상에 오르면 고랭지 채소밭 수십만 평이 펼쳐져 있다. 그 위의 세상은 말 그대로 설국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올겨울 강원도 지역은 가뭄이 심하다. 하나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강원도는 원래 2월에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 눈꽃 트레킹의 계절은 이제 절정에 오르는 참이다.
글=손민호 기자
안반덕에 올라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왕년에 폭설이 쏟아진 이튿날 종종 TV 뉴스에 등장했던 마을이다. “올겨울에도 대기4리는 고립됐습니다….”
그 대기4리를 구성하는 한 동네가 안반덕이다. 떡메로 쌀을 내리칠 때 쓰는 ‘안반’처럼 생긴 ‘덕’(산 위에 형성된 평평한 구릉)이라 하여 안반덕이다. 다시 말해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 위에 펼쳐진 광활한 구릉이 안반처럼 생겼다는 얘기다. 여기도 고랭지 배추밭이다. 귀네미골보다 두 배쯤 넓다.
워낙 후미진 데여서 안반덕엔 여러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안반덕을 채소밭으로 바꾼 건 박정희 정부 때다. 그 시절, 나라는 강원도 산자락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모아 안반덕에 올려 보냈다. 직접 가꾼 땅은 가꾼 사람에게 준다는 나라의 제안에 화전민은 솔깃했다. 그러나 자갈투성이 구릉을 일구는 건 쉽지 않았다. 가을이면 도토리로 끼니를 때웠고, 겨울이면 밤새 내린 눈이 길을 지웠다. 하여 눈 내린 다음 날, 헬리콥터가 날아와 음식을 던져주고 돌아갔다. 그 현장을 TV는 매번 중계했다.
함석헌 선생에 얽힌 일화도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상임대표로 선출된 함석헌 선생은 시위에 적극 나서지 않는 시민에 실망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겨울을 난다. 그 산골이 여기 안반덕이다.
강원도 태백 귀네미골.
한겨울 안반덕은 무인지대다. 띄엄띄엄 들어앉은 집과 창고는 비어 있다. 안반덕 주민은 배추 수확이 끝나면 모두 강릉으로 내려가 겨울을 난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설국 위에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흔적을 남겼다. 발자국만으론 왠지 아쉬워 눈 위에 누워 몸자국을 만들었다. 그렇게 누워 작은 후회를 했다. ‘비닐 포대 가져올 걸. 그거 타고 눈 쌓인 밭을 신나게 내려가는 건데’. 눈 속에선 누구나 어린아이가 된다.
귀네미골을 아십니까
처음 귀네미골에 든 건 지난해 여름 끝자락이다. 야생화를 좇아 강원도 백두대간을 훑다가 우연히 들어선 골짜기가 귀네 미골이었다. 해발 1100m 고지 위엔 전혀 딴판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100만㎡(약 35만 평)에 이르는 능선과 비탈은 오로지 배추로 푸르렀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푸른 세상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막 배추 수확이 시작된 때. 잔뜩 굽힌 농부의 허리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때 잠깐 들었던 생각이 있다. 이 시퍼런 땅 위에 눈이 내려 쌓이면 어떤 모습일까.
눈이 오길 기다려 귀네미골에 다시 들었다. 이번엔 미리 공부를 했다. 귀네미골은 태백시 하사미동 광동마을로, 능선은 백두대간 위에 있으며 능선 너머는 삼척 땅이다. 『정감록』은 최적의 피란지 중 하나로 이곳을 꼽았고 ‘덕’이 많아 예부터 화전(火田)이 성행했다. 귀네미골이란 이름은 ‘귀넘이’가 변한 것으로, 본래 꼴은 ‘어귀’였다. 새 세상 어귀에 놓인 골짜기란 뜻이다. 89년 광동댐이 인근에 생기면서 수몰민들이 여기로 이주했다. 모두 37가구가 들어왔고, 그들은 비탈을 따라 배추를 심었다. 그리고 지금, 귀네미골은 해마다 5t 트럭 200대 분량의 배추를 생산한다.
해뜰 녘에 맞춰 능선에 올랐다. 귀네미골에선 고도 때문에 정동진보다 1분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다. 능선 위의 바람은 모질었다. 카메라 삼각대를 세울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능선 위에 풍력발전소를 세우려는 태백시의 계획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 드센 바람 탓이었다. 눈은 내리기가 무섭게 날아가 버렸다. 능선과 비탈에 눈이 쌓이지 못한 까닭이다. 대신 능선 아래엔 날아온 눈까지 더해져 눈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한 발 디뎌보니 허리까지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마냥 걸었다. 구덩이에 빠지고 어기적어기적 눈길을 헤치고, 엉덩방아 찧고 미끄럼 타며 하염없이 걸었다. 바람이 더 이상 맵지 않았다.
[T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