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도>56. 유학파 영화감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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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 국영화의 흥행성공율이 여전히 바닥 신세를 면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한국영화들이 이미 20여편이나 만들어지는 등 신작 기획.제작이 줄을 잇고 있다.이같이 한국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데에는 영화자본의 증대 뿐만아니라 젊은 감독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젊은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 데에는 젊은 층에서 영화에 대한 대단한 관심이 일어나고 해외에서 영화제작.연출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온 인재들이 많기 때문이다.현재 기획.제작되고 있는 우리 영화가운데 절반 가량은 해외유학에서 갓돌아온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어느새 충무로엔 토종과 유학파가 갈리게 된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 데뷔감독들 가운데는 해외유학이라는 다소 신비화된 경력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해 그다지 검증되지 않은 인재라도 충무로에서 조감독 경험없이 '입봉'하게되는 경우가 부쩍늘게 되었다.

예전에'대부'의 프랜시스 코폴라와 동급생으로 UCLA 영화과를 졸업하고 70년대 중반 돌아온 故하길종감독은 당시 시대상을 비꼰'화분'으로 데뷔하며 우리 영화계의 큰나무가 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뜻밖에 요절하는 바람에 이후 유학 인맥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어 박광수.김홍준 감독등이 각각 프랑스와 미국에서 나름대로 영화수업을 하고 돌아왔으나 충무로 연출부에서 잔뼈가 굵어 굳이 유학파라고 분류하는 것이 오히려 어울리지 않은 편이다.이후 80년대에 영화연출 등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한 인물로는 지난해'닥터봉'으로 각광받은 이광훈 감독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영화제작석사(MFA)를 받은 李감독은 88년 귀국후에도 김종학 감독의 MBC'여명의 눈동자'연출팀에 합류해 우리식 드라마 제작체제를 배웠고 이장호 감독의'코뿔소와 코란도'조감독을 하는 등 충무로 시스템에 적응하는 기회를 가졌다.

하길종의 뒤를 이어 UCLA에서 공부한 이광모(37)씨는 동숭시네마텍을 예술영화전용관으로 키우는 한편 영화사'백두대간'을 통해 국내에서 보기힘들었던 세계의 수작들을 국내 상영해 작품활동 이외의 공헌이 컸다.이 감독은 치밀하고 신중하게 준비중인 데뷔작'아름다운 시절'로 MFA를 받게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홍상수(37.시카고 시각예술학교)감독,'세친구'의 임순례(37.파리8대학)감독등은 습작중에 만든 단편 작품들이 인정을 받아 흥행성이 난망함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제작자를 찾을 수 있었다.

또 김용태(34.뉴욕대)감독은 '미지왕'으로,김본(콜럼비아대학)감독은'베이비 세일'로 올해 데뷔했다.이와함께 미라 소르비노,금성무 등 외국배우들을 캐스팅한'투 타이어드 투 다이'의 진원석(뉴욕시각예술학교),박철수 제작의'러브 러브'를 최근 제작발표한 이서군(23.뉴욕대),뉴욕서 같이 공부하던 스탭들과 함께 '억수탕'의 촬영을 최근 마친 곽경택(31.뉴욕대),'은행나무 침대'의 조감독을 거쳐'퇴마록'을 준비하고 있는 박광춘(뉴욕대)등도 유학파의 신진들이다.

한편 유럽쪽에서 유학한 감독들로는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프랑스 국립영화학교(FEMIS)를 졸업한 변혁(30)이 있다.그는 올해 프랑스에서 먼저 데뷔한뒤 국내 극영화로 진출할 계획이며,'접속'을 촬영중인 헝가리국립영화학교출신의 장윤현,안성기 주연의'이방인'촬영을 마친 폴란드 우쯔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한 문승욱 감독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최근에 데뷔 또는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유학파 감독들은 이루 다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형편이다.

선진 영화제작 시스템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온 감독들은 늘어질대로 늘어져 구습에 빠져있는 우리식 촬영 현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비교적 합리화.전문화 되지 못한 스탭들과 곧잘 마찰을 빚기도 했다.

유학을 경험한 감독들은 실무에 있어서▶철저한 준비에 의한 시간절약▶각 제작 분야의 전문분업화▶외국의 축적된 기술과 첨단 장비들을 이용한 새로운 기교▶판에 박힌 장면연출에서 벗어나는 과감하고 실험적인 시도들 등 새바람을 일으켰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근본 문제는 작품의 질. 몇 몇 습작 단편들에서 예감되었던 날카로운 분석력이나 톡톡튀는 참신성을 높이사 막대한 제작비가 투자되었던 유학파 감독들에 대한 기대의 거품도 서서히 거둬지고 있다.

제작자들은 상당히 기대를 모았던'미지왕'(김용태)'베이비세일'(김본)'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오일환) 등에 적잖이 실망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고전영화에서 빛나는 장면들을 멋지게 차용하는 등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더라도 영화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 만큼 한국식 제작 시스템에 대한 실무 경험 부족으로 실제 현장 장악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공통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상주의적인 실험성을 추구한 나머지 관객은 물론 스탭들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작진행도 종종 볼수 있다는 것이다.

한 제작자는“젊은 감독들의 연출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연출부 수업이 일천한 데뷔감독의 경우 촬영현장의 파트너라고 할수 있는 촬영감독은 다년간 경험을 쌓은 쪽으로 찾게되는 것이 상례”라고 말한다.

개성있고 합리적인 감독과 노련한 현장경험을 갖는 촬영감독이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는 데 이러한 조합이 항상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한 형편이다.

한편 흥행을 최우선시 하는 대기업 자본의 투자자들은 작품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더라도('세친구''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등) 흥행가능성이 희박한 작품들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습성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학때 품었던 예술영화 창작에 대한 푸른 꿈은 쉽게 흥행위주의 상업영화에 타협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유학하고 돌아와 데뷔한 한 감독은“외국서 영화제작을 공부한 것이 별다른 특기사항은 없다.한국에서 버젓한 영화 교육체계가 없었을 뿐이다.아무리 실습위주의 교육이라도 한국적 상황을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안된다.한국에서의 영화제작은 그 자체가 새로운 영화공부의 시작일 따름이다”라고 역설한다.

이광훈 감독은 오하이오주립대학석사를 마치고 돌아올때 그곳의 은사가 한 말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여기서 배운 것은 다 잊고 새로 배우기 시작하라”. 선진학교에서 얻은 실무적인 기술보다 우리 땅에서 우리들의 삶을 조망하는 경험과 세계관을 넓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채규진 기자

<사진설명>

▶좌로부터'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세친구'(임순례)'닥터봉'(이광훈)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