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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취임사에 깔린 ‘다인종 가족’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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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11면

“우리나라는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힌두교는 물론 무신론자의 국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구상 곳곳에서 온 다양한 언어와 문화로 구성된 국가입니다.”

케냐인 아버지서 중국계 매제까지

20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사 중간에 했던 말이다. 그의 말은 이슬람 세계와 미국 사이의 분쟁을 넘어 이슬람교도인 양아버지(인도네시아 국적)와 케냐 출신 친척들을 연상시킨다. 부인 미셸의 사촌 오빠는 유대교도며, 오바마의 친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오바마의 여동생 부부는 철학적 차원의 불교 신자를 자처한다. 이들이 쓰는 언어도 제각각이다.

오바마의 취임사를 관통하는 줄거리는 위기, 그리고 통합이었다. 통합은 오바마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에서 빠지지 않는 강력한 주제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사에서 “미국의 이상은 미국의 무수한 다양성 덕택에 형성됐고, 그로 인해 가장 강력한 단결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2001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역시 “미국은 혈통이나 가문이나 땅을 기반으로 단결해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혼란 너머 공동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통합을 말할 때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취임식장에 모인 대통령 부부의 가족은 오바마의 통합 메시지가 단순한 정치적 수사(修辭) 이상임을 웅변해 줬다. 저 멀리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오바마의 양할머니 사라 오바마는 흑인이고, 오바마의 이부(異父)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아버지를 두었다. 마야의 남편 콘래드는 중국계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부모를 둔 캐나다 국적 소유자다. 미셸의 오빠는 백인 아내와 함께 왔다. 미셸의 친척 상당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이다. 최근 족보학자들은 미셸이 아프리카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인근으로 끌려온 노예의 자손이며, 미셸의 선대 할아버지가 20세기 초 북쪽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오바마 부부가 그의 이부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와 콘래드 응의 2003년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오바마, 마야, 콘래드의 부모(조앤과 하워드), 마야의 남편 콘래드, 콘래드의 남동생 페리, 미셸. 앞줄 왼쪽부터 딸 샤샤, 말리아, 할머니 매들린 던햄. 마야 소에토로 제공=IHT

오바마와 미셸의 가족·친척은 흑인·백인·황인종을 아우르고 있다. 언어상으로는 영어·인도네시아어·프랑스어·캐나다어·독일어·히브리어를 비롯해 남아프리카 지역의 다양한 사투리를 사용한다. 부유한 사람도 몇몇 있지만 가난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케냐에 있는 오마바의 할머니 집에는 최근에야 전기·수도가 들어왔고, 지붕은 낡은 양철판으로 돼 있다. 그린카드(영주권)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오바마의 고모는 한때 불법 체류자였다.

오바마의 가족사는 미국 가정의 인종 지도를 그대로 보여 준다. 백인 중 4분의 1, 흑인 중 절반 가까이가 다인종 가정에 속한다. 전체 인구의 67%(2005년)를 차지하는 비(非)히스패닉계 백인의 비중은 2050년 절반 이하(47%)로 줄어들고, 히스패닉계는 14%에서 29%로, 아시아계는 5%에서 9%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흑백 결혼은 오마바가 태어난 60년대 초 시작해 미국 모든 주에서 합법화돼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오바마 부부 친척의 계층도 다양하다. 오바마를 키운 외할머니는 손자의 비싼 학비를 대기 위해 평생 힘들게 일했다. 지난해 11월 대선 승리 직전 하와이의 작은 서민용 임대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는 가구 세일즈맨으로 전국을 떠돌다 하와이에 정착해 가구 판매상을 차렸지만, 돈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북부에서 희망을 찾던 미셸의 선조는 농사를 짓거나 행상을 하거나 트럭을 몰며 가난하게 살았다. 일거리를 찾기 위해 집을 떠난 후 14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 노메니 로빈슨 때문에 미셸의 아버지 프레이저는 11세 때부터 우유 운반 트럭 조수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고향에 돌아와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게 된 로빈슨은 평생 자린고비처럼 살았다. 그런데도 빚은 늘기만 했고 아들 프레이저는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했다. 프레이저는 평생 보일러실에서 일하면서 친척 동생 네 명의 학비를 댔고, 미셸과 오빠 크레이크를 최고 명문 사립대인 프린스턴대에 보냈다.

오바마의 취임사 중엔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의 여정은 일보다 여가를 좇고 부와 명성의 즐거움만 추구한 사람들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번영과 자유를 향해 길고 험한 길을 달려온 이들의 것이었습니다.” 평생의 버팀목이었던 외조부모, 혹은 아내 미셸의 부모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읽힌다.

오바마의 여동생 마야는 취임식 전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우리 가족의 모습이 기존의 백악관에서는 색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미국 전체에서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백악관이 이 나라의 모습을 항상 제대로 반영해 온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케냐·인도네시아와 직·간접 인연을 맺고 있다. 생부는 케냐인 유학생이고, 어머니가 이혼한 뒤엔 인도네시아에서 계부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 때문인지 취임사에서 “빈곤국의 국민에게는 식량 지원과 농장 개발, 상수도 정화시설을 지원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큰 국가들 수도에서부터 내 아버지가 태어난 (케냐의) 작은 마을까지 모든 국민과 정부는 들으십시오”라며 청중의 범위를 미국인이 아니라 세계인으로 넓혔다.

오바마의 취임사에선 국가(nation)라는 단어가 15번이나 등장했다. ‘유치한(childish) 갈등과 반목을 중지하고 보다 높은 이상에 따라 미국을 재건(rebuild)해야 합니다’고 호소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도로·교량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광대역 통신망 개설, 태양력·풍력 에너지 개발, 교육제도 개선 등을 약속했다. 또 국가 재건을 위해선 봉사정신과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공익과 상상력이 결합하고, 필요가 용기를 만날 때 못 해낼 것이 없습니다”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취임사의 마무리는 건국의 아버지들 이야기였다. 자신의 역할 모델(role model)인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그는 혹한의 모닥불 주변에 모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선조를 말했다. 자유와 존엄을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와 온갖 역경을 뚫고 미국을 건설했다는 그들이다.

오바마는 취임사 마지막 문장에서 “후손에게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지평선과 신의 축복을 응시하면서 전진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고 말했다. 절망적 현실에 굴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도전해 온 오바마와 미셸의 가족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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