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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를 탐험하다 - 프리드쇼프 난센

중앙일보

입력

청년시절 난센


노르웨이 출신의 프리드쇼프 난센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지탐험가이다. 그는 여러 차례 북극 탐험으로 미지의 땅을 발굴해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난센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가로 기억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숲과 땅에 관심이 깊은 지질학자였고 ‘걷기’가 척추와 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꾸준히 연구한 신경학자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난센에게는 야생소년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소년에게는 야생 동물을 찾아 숲과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즐거운 일상이었다. 난센이 자연학문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데에는 산과 강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야외 경험들이 크게 좌우했다.
1882년 대학에서 동물학을 공부한 스물 한 살의 난센은 그린란드 해역으로 떠나는 탐험선 ‘바이킹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난센은 주저하지 않고 바이킹호에 몸을 싣는다. 바다표범을 잡기 위한 이 항해는 난센에게 생애 가장 큰 선물을 안겨준다.

“바이킹호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여태껏 밟아보지 못한 공간의 지맥과 수맥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만년설을 접하고 나서 내 인생은 달라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만년설 위를 횡단해야겠다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내가 완전히 탐험가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며 명성 또한 떨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신세계를 내 발로 직접 걸어보고 싶은 욕망과 호기심에 가슴이 뜨거웠다”

만년설에 완전히 압도당한 난센은 1887년 그린란드의 만년설을 횡단하겠다고 발표한다. 이듬해 6명의 대원을 이끌고 그린란드 해역으로 출발한다. 1888년 9월 5일 당시 탐험 코스 중에서 최고의 고도였던 2,676m 지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11일 후 서해안의 아메랄리크 피오르드에 닿을 수 있었다. 경계했던 겨울이 왔지만, 난센 일행은 다행히 고드호브 마을에 도착해 겨울을 나게 된다.
난센과 그의 대원들의 눈에 고드호브 마을은 매우 낯설고 이상했다. 이곳의 토착민들은 무척이나 과묵했지만, 밤이 되면 불을 지피고 노래를 불렀다. 북극곰처럼 큰 짐승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로 나와 별빛을 향해 위령제를 지냈다. 이방인들은 새하얀 눈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온통 신비롭고 놀라웠다. 난센은 마을사람들의 생활상을 눈여겨 살폈으며 이를 꼼꼼히 기록했다. 얼음으로 지은 집에서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토착민들은 세상에 ‘에스키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얼음나라 사람들의 문명은 난센의 마음을 한참동안 사로잡았다. 난센은 서서히 에스키모인들과 교감을 나누는 법을 터득했다. 천체와 바다, 동물 등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 조예를 갖고 있던 난센에게 이들은 교감을 나누어야 할 또 하나의 세계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연구 분야가 한 가지 더 늘게 되었다. 얼음나라에서 빠져나와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3 년간 에스키모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에스키모의 생활 eskimoliv>(1891)이라는 저서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1890년, 스물아홉살의 난센은 북극해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고 있었다. 수많은 탐험가들에게 삶의 목표가 되어 주었던 동시에 극한의 좌절을 안겨주었던 북극해가 난센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탐험지였던 것이다. 난센은 얼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찰 결과 북극해의 얼음은 시베리아에서 스피츠베르겐 쪽으로 표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난센은 ‘빙고!’를 외쳤다. 물길을 파악했으니 얼음의 이동경로 예측이 가능해졌고 이것을 잘 이용하면 원하는 탐험을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난센은 마치 귀를 막고 사는 사람처럼 특수한 배를 만들기에 나섰다. 바다를 항해하다가 얼음을 만나더라도 배가 얼음 위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올라갈 수 있는 디자인을 고안했다. 그 배를 타고 얼음을 헤쳐 시베리아 동부 해안까지 나아가는 게 그의 당면 목표였다. 그곳 해안에 정박해 배가 얼어 얼음과 한몸이 되면 해류를 타고 북극해를 가로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센은 이 위험천만한 탐험계획을 노르웨이 지리학회에 제출했다. 그의 계획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당대의 북극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밀어붙이려 하는 난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회의 태도는 달랐다. 노르웨이 의회는 난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절반 이상의 탐험 경비를 부담했다.
배의 이름은 프람호로 지었다. 전진한다는 의미의 forward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 배는 지금도 오슬로에 보존돼 있다.
1893년 6월 24일 난센이 설계한 프람호가 크리스티아니아항을 출발하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를 비난했던 탐험가들마저도 그날만큼은 모두 항구에 나와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승선한 프람호의 대원은 총 13명이었다. 그들은 난센과 함께 3개월간 항해 끝에 북위 78°50′, 동경 133°37′ 지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표류할 목적으로 얼음에 갇혀서 꽁꽁 언 프람호 속에서 생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센은 조금씩 안도하게 됐다. 얼음의 압력을 견디지 못 하고 선체가 파열되고 말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견이 보기 좋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배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빙하의 압력을 견뎌냈다.
1895년 3월 14일 배의 상태에 확신을 얻은 난센은 북위 84°4′, 동경 102°27′ 지점에서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대원 한 사람을 동반하여 개썰매를 타고 북쪽으로 달렸다. 4월8일 썰매를 끌고 나온 지 정확히 24일 째 되던 날이었다. 그들은 북위 86°14′ 지점에 닿았는데 그곳은 당시로서는 인간이 밟은 땅 중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곳이었다.

북극 탐험 대원들

정복지를 벗어난 난센은 뱃머리를 돌려 프란츠조지프 섬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날씨 계산이 잘못 된 바람에 그들은 엉뚱한 섬으로 가게 되었다. 1895년 8월 26 그들이 닿은 곳은 ‘프레더릭 잭슨 섬’이었다. 프레더릭 잭슨은 영국의 북극탐험가 이름으로 난센이 그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오랜 선체 생활에서 벗어나서 그들은 집을 지어 지내기로 했다. 대원들은 나무와 돌을 모아서 아늑한 오두막을 짓고 굴뚝도 만들었다
“고생하는 대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잭슨 섬에서의 생활은 예술적이다. 섬의 지맥을 파악하려면 등고선을 추측해서 일단 지도부터 만들고 물기가 많은 식물들을 찾아 나서면 된다. 물을 머금고 있는 식물들을 찾아가면 수맥을 찾을 수 있고 그곳에서 새나 작은 동물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해변에서 사냥을 하는 것 보다 안쪽으로 수맥을 찾아 걷는 일이 더욱 즐겁다.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기분이랄까. 좀처럼 정답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신비롭고 앙증맞은 힌트들이 매일 내 발길을 즐겁게 한다.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얼굴 피부가 갈라 터져서 아픈 것인데 이것은 바다코끼리 기름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기를 말려서 구워먹도록 하고 기름은 따로 긁어모아서 통에 담아둬야겠다. 바다코끼리의 기름을 얼굴에 엷게 펴 바르면 촉촉해지는 느낌과 함께 통증이 사라진다.”

난센과 대원들은 한동안 바다코끼리와 어울려 섬생활을 누리다가 우연한 기회에 영국의 탐험대들을 만나게 된다.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들은 고향 노르웨이로 돌아오게 되었다. 난센의 노르웨이 입성,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을 만큼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각계의 인사들이 그를 초대했고, 날마다 그를 위한 파티가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난센이 가장 집중했던 것은 동물학과 중추신경학에 대한 공부였다. 정복자라는 칭호를 마다했던 그는 자신이 탐험한 곳의 토질과 동식물들을 연구하는 일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1882년 베르겐 박물관은 난센의 이러한 뜻을 높이 사서 동물학 관장직을 주었다. 난센은 당장 동물학과 조직학에 관련된 중요한 논문들을 쓰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처음으로 신세계의 동물들을 소상히 구경할 수 있었다. 미술에도 재능이 뛰어난 난센이 동물들의 그림을 자세히 묘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물의 종과 서식 장소와 걷는 방법 등에 따른 중추신경계의 조직학적 구조에 대한 논문은 크게 히트를 쳤다. 크리스티아니대학은 난센에게 기꺼이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1896년, 난센은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의 동물학 교수가 되었다. 난센의 학구열은 나이가 들수록 더해가 해양학에도 몰두했고 교수직까지 얻게 된다.

중년의 난센


난센의 노년기는 모든 탐험가들 중에서 아니 모든 학자들 중 가장 인상적인 시기였다. 난센은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 완성해온 논문들이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읽혀지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반인이나 어린아이들이 즐겁게 볼 수 있도록 쉬운 에세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치가로서의 난센의 활동도 주목해볼만 하다. 난센은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대처했다. 1920년 그는 국제연맹의 첫 회의에 노르웨이 대표로 참가했는데 그 당시 연맹회원들 전원이 난센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하고 지지했다. 덕분에 난센은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1920년 4월, 국제연맹이사회는 난센을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하여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전쟁포로 약 50만 명을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소련정부는 국제연맹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련 측은 국제연맹은 인정하지 않지만 난센과는 개인적으로 협상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난센의 협상 능력은 탁월했고 1922년 9월, 42만 7,886명의 포로가 모두 송환되었다.
난센은 인생의 말년을 모두 세상을 구제하는 데 몰두했다. 특히 러시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난센에게 큰 빚을 진 국제연맹이나 재계의 모든 단체들이 기금 조성을 거부하고 외면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직접 거리로 나가 연설을 통해 민간 기금을 조성했다. 거리에는 ‘난센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종류의 표어가 넘쳤다. 난센은 이 기세를 몰아서 난민들에게 신분증명서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1922년 7월 5일, 제네바는 난센의 뜻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거리의 난민에게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신분증명서가 발급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난센 여권'이다. 같은 해 난센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이에 비난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센은 노벨 평화상 상금을 모두 국제구제사업에 기부했다.

사진출처 / 프람박물관 http://fram.museum.no

워크홀릭 담당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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