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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찾아서>29. 장사 麓山寺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짝 더 나가라(百尺竿頭進一步)’는 화두를 낳은 장사경잠선사(?~868)의 게송이다.

경잠선사는 조주종심과 함께 남전보원선사의 양대 제자로 호남성 성도인 장사시 녹산사(麓山寺)에서 마조의 선풍을 드날렸던 선장이다.

경잠선사의 화두 ‘백척간두진일보’가 1천2백년만에 되살아나 중앙일보 지면에서 찬연히 빛을 발했다. 지난 4월28일자 중알일보 지령 1만호 축하 휘호로 중국 인민일보 사오화쩌(邵華澤)사장이 이 화두를 써보내 게재된 것이다. 이 화두는 한마디로 ‘정상에의 도전’을 뜻한다.

백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에서 한걸음을 더 내디디면 분명히 떨어져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진여라는 절대(絶對)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한번 크게 죽어야 한다. ‘백척간두진일보’가 지향하는 구극(究極)은 절대 최상이다. 이 때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분별의식의 소멸을 상징한다.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할 때 흔연히 목숨을 내건다. 정신적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분별지(分別智)를 여의지 않으면 안된다. 절대 진여는 언제나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

따라서 백척간두에서 한발짝 나가야만 절대 진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 절대 진여와 맞닿는 순간은 바로 선과 악,범(凡)과 성(聖)을 2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분별심이 사멸하는 찰나이기도 하다.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내딛는 것은 단지 겁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세계는 그 본질이 불생불멸인 우리의 자성(自性)에서 생성되고 구현된다. 마치 옛 중국 천하가 황제의 통치 범주에 들어가 있던 것과 같다. 이처럼 전 우주를 통괄하는 자성은 죽음과 삶을 구분하는 분별의식만 내던지면 천 길 낭떠러지에서 한걸음 나가 떨어져 죽어도 죽는게 아니다. 흔히 크게 살려면 한번 크게 죽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인간은 신에게 직접 닿는 순간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절대’라는 것은 ‘상대’를 절대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서구 신학과 철학의 논리다. ‘백척간두’라는 화두도 철학적으로는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자랑하는 젊은 궁수가 중국 황제에게 인간문화재로 지정해 주기를 간청했다. 황제는 산속의 한 늙은 궁수에게로 보내 ‘인정’을 받아오라 했다. 노인 궁수가 젊은 궁수에게 물었다.

“자네는 활과 화살은 왜 가지고 다니나.”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궁수니까 당연히 활을 가지고 다니지요.”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움막뒤 절벽으로 젊은이를 데리고 갔다. 노인은 까마득한 천 길 절벽 위를 두발의 반은 절벽 밖을 딛고 걸어갔다. 그러면서 젊은이에게 “한 사람 더 걸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따라오게”라고 했다. 젊은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감히 뒤따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슨 궁수가 그 모양인가.”

노인은 이 한마디에 이어 “자네는 화살 하나로 새를 몇마리나 잡나”하고 물었다.

“그야 물론 한마리지요.”

청년은 대답에 이어 “노인장께서는 몇마리나 잡으십니까”고 물었다. 마침 새떼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자네가 숫자를 세어 보게”라며 새떼를 그냥 쳐다만 봤다. 무려 일곱마리가 떨어졌다. 기가 죽은 청년에게 노인은 한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면 눈 자체가 화살이 되네. 하지만 자네는 아직 절벽끝을 걸을 수도 없는 처지라면 자네의 궁술은 완벽할 수 없네.”

노인은 마음속에 어떤 동요도 없이 절대적으로 현존(現存)하면 그 현존 자체가 화살이 될 수 있다는 무심의 경지를 멋지게 설파한 것이다. 말하자면 노인 궁수는 선의 달인인 셈이다.

대문장가 도연명(365~427)은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無絃琴)를 벽에 걸어놓고 술이 얼근히 취하면 어루만짐으로써 몰현금의 ‘소리없는 음악’을 즐겼다 하지 않던가.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도연명의 음악도 바로 ‘절대 현존’의 화살이다.

‘백척간두진일보’와 같이 선림(禪林)의 화두나 선문답의 일화들이 고사성어가 된 예는 수없이 많다. ‘강호제현(江湖諸賢)’‘천차만별(千差萬別)’‘정저합마(井底蛤마)’등도 선불교에서 유래한 대표적 고사성어들이다.

재야의 인재·지식인을 가리키는 ‘강호제현’은 강서성 홍주 개원사에 주석하던 마조도일선사와 호남성 남악 형산의 석두희천선사 문하로 구름같이 모여들어 선을 배우던 당대의 수재들을 말한 것이다.

강(江)은 마조가 있는 강서성(江西省),호(湖)는 석두가 있는 호남성(湖南省)의 앞 글자고 제현은 수재들을 말한다.

‘천차만별’은 조동종 개산조인 동산양개선사(807~869)의 법어에서, ‘우물안 개구리’는 동산선사의 제자인 둔유선사와 한 납승의 선문답에서 각각 유래한 성어(成語)다.

녹산사(古麓山寺).

‘백척간두진일보’를 역설한 경잠선사의 체취를 느껴보고자 찾아간 장사시 남쪽 야트막한 산록의 옛 녹산사는 비교적 온전히 보존돼 있는 고찰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답사는 대실패였다.

주지실로 갔다. 주지는 40대 초반인데 방문 목적을 말하니 자신은 부임한지 얼마 안돼 잘 모른다면서 70대 노승 한명을 불러 안내토록 했다.

경잠선사 유적 안내를 청했더니 아예 녹산사에 그런 선사가 주석한 일이 없단다. 앞이 캄캄해진다. 틀림없이 당나라때 경잠선사가 이 절에 주석했었다고 우겨봤지만 외국인이 어찌 ‘본토인’보다 더 잘 알겠느냐는 눈치다. 주지가 마침 하남성 불교협회 발행의 불교계간지를 내밀면서 여기에 ‘녹산사 특집’이 있으니 보란다. 이 잡지에도 경잠선사는 안나와 있다는 투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다. 대충 훑어내려가는데 ‘장사경잠선사’이름이 또렷이 나와있지 않은가. 기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고 하니까 노승과 주지가 머쓱해한다. 아마 그들은 이 특집을 자세히 읽지 않았던 것 같다.

노승은 기자와 함께 절 경내를 돌다 경잠선사 유적을 찾으려는 기자의 노력이 허사라는듯 몸이 불편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할수 없이 우리끼리 뒤져봤다. 급기야 경잠선사의 발자취를 하나 찾아냈다.

호잠당(虎岑堂).

현재 승려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는 요사의 편액이다.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의 별명이 ‘호랑이’였기 때문에 흔히 그를 끝이름자에 호(虎)자를 붙여 ‘호잠’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호잠당은 원래는 경잠선사의 기념관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별명이 오늘에까지 편액으로 전하고 있어 반가웠다.

승려 입주가 일천한 중국 사찰들은 자기 절 연혁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증명 : 月下 조계종 종정

圓潭 수덕사 방장

글 : 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 : 장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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