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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30도 혹한속 18일간 추적 - 박수용 PD 시베리아 호랑이 촬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EBS 자연다큐멘터리팀이 야생상태에서 시베리아 호랑이를 첫 촬영한 것(4월11일자 21면 보도)은 눈쌓인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18일간의 추격전 끝에 거둔 개가였다.2월말부터 영하 30도의 혹한속에서 시베리아 호랑이 추적에 나섰던 박수용 PD가 취재메모를 바탕으로 생생한 생포기를 보내왔다. [편집자]

아내가 딸을 낳은지 보름도 채 안된 2월말 촬영팀은 동시베리아로

향했다.멀리 비행기창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동토 블라디보스토크는 온통

하얗다. 2월28일.우리보다 앞서 시베리아 호랑이 촬영에 도전한 일본방송팀이 13일만에 호랑이 생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소식이 우리를 더욱 자극했다.특히 캄차카에서 불곰 촬영도중 일본팀중 1명이 실족사했다는

소식은 우리팀을 더욱 긴장시켰다.

동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맞는 3.1절.우리를 반겨준 것은 조상대대로

개와 맨손으로 호랑이를 생포해왔다는 전문 사냥꾼 3명.

“새끼 세마리를 낳는 호랑이는 생후 2년 정도 되면 어미가 키울 능력이 없어

죽기 때문에 당국이 생포를 허가한다”고 추격대장 쿠르그로프가 생포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사슴가죽을 덧댄 눈신발.스키.총 세자루와 보름치 식량을 챙긴채 사냥개

네마리의 안내를 받으며 트럭과 스노 모빌을 타고 라조지역에

도착했다.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사이 시베리아 조선곡(谷)에서도

수십㎞ 떨어진 깊은 산속이다.

눈덮인 타이가림에 솟은 아름드리 전나무에는 텃세를 표시한 호랑이

발자국이 혼통 휘갈겨져 있었다.

3월2일.전날 내가 다닌 발자국 위로 수컷 호랑이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임시 거처인 산막 주위를 밤새 어슬렁거리다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사냥개 우두머리인 반지트가 3일 새벽부터 짖어댔다.일어나 보니 숙소

주위에는 어김없이 왕호랑이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우리가

호랑이를 쫓는 건지 호랑이가 우리를 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3월5일.눈이 계속 내렸다.호랑이 발자국도 놓쳐버렸다.그간의 고생은

도루묵이 돼버렸다.이름 모를 나무덩굴을 잘라 차를 끓여 마시며 허탈함을

달랬다.

1년6개월쯤 된 새끼호랑이 세마리의 발자국을 발견한 3월7일 아침 팀원들은

고무됐다.추적 1주일만의 성과였다.94년 이후 호랑이 추적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인지 러시아 추적꾼들이 더 반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쿠르그로프 대장이“낙오 가능성이 높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제지하고 나선 것.자신들이 생포한뒤 촬영하라고 친절을

베풀었으나 취재팀은“낙오되면 돌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겨우

그들을 설득했다.

거리가 좁혀지면 사냥개를 풀었으나 추격과 허탕이 수없이 반복됐다.모두들

지쳐버렸다.식량도 바닥났다.간혹 호랑이가 먹다버린 사슴고기가 우리를

구원했다.

3월17일 러시아인들이“철수하자”고 제의했으나“조금만 더 가보자”며

우리측에서 우겼다.

3월18일 오전10시쯤 사냥개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선두를 걷던

대장이 대원들을 멈춰세웠다.

소리없이 사냥개를 풀었다.반지트에 이어 호랑이에게 어미를 잃었다는

바르비가 복수하듯 돌진한다.15분이 지났을까 눈덮인 타이가 수풀속에서

호랑이와 사냥개가 뒤엉켜 싸우며 내뱉는 울부짖음이 골짜기를

울렸다.추격꾼중 안드레이가 허공에 공포를 쏘아대며 사냥개를 독려했다.

어미호랑이는 새끼 한마리를 버리고 도망가버렸다.추적팀은 스키를 벗고

현장으로 달려갔다.1가 넘는 눈속이라 호랑이도 더이상 도망치지

못했다.사냥개가 달려들어 서로 물어뜯기 시작했다.개와 호랑이 모두 피를

흘린다.이틈을 놓칠세라 추적꾼들은 눈깜짝할 사이 달려든다.쫓기기에 지쳤다는듯 호랑이도 자포자기로 푹 주저앉아 생포는 성공했다.동물원 철조망이 아닌 야생의 숲에서 시베리아 호랑이를 만난 순간이다.도보로 4백50㎞ 눈길을 숨바꼭질 하듯 18일을 헤맨끝에 만난 생

후 1년8개월된 시베리아 호랑이.드넓은 타이가를 누비다 생포된 놈의 눈빛이

어쩐지 연민을 자아낸다.

“당신같은 독종은 처음봤다”고 나에게 말한 러시아 추격꾼들은

호랑이에게'수용호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진설명>

시베리아 호랑이 생포는 몇단계를 거쳐 이뤄진다.우선 사냥개가 호랑이의

퇴로를 차단한다.이어 숙달된 사냥꾼들이 달려들어 생포한다.이때 마취총은

생명에 위험을 줄 수 있어 사용하지 않는다.사진은 시베리아 호랑이를

생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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