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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10.가야금산조.단원의 풍속화.추사의 서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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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국은 외모로만 보면 작은 존재지만 실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나라다.강대국 사이에서 수천년의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자기 얼을 지키고 고유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으로부터 66년전 육당(六堂)최남선(崔南

善)은 조선의 역사는 사회가치보다 문화가치를 더 높이 발휘했다고 지적하면서“문화의 창조력에 있어 조선인은 진실로 드물게 보는 천재민족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그는 활자.고려자기,그리고 측우기의 발명을 그 예증으로 들었다.

육당의 지적대로 그것들은 우리 민족의 훌륭한 창조물임에 틀림없다.그러나 내우외환의 역사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국민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창조와 발명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참담한 현실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배양되었던 것은 한(恨)풀이의 지혜를 가져온 천지신명과의 합일에서 가능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추운 지방에 펼쳐지는 적설(積雪)의 침묵을 쫓아내는 힘을 가진 야릇한 미감이 한국인에게 있는데,그것이 샤머니즘의 맥박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가야금 산조(散調)와 단원(檀園)김홍도(金弘道)의 풍속화,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체를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예술에서 강한 신통력에 의한 작품들이고,그 점에서 한국의 예술 정신

을 밑으로부터 지탱해 온 전형적인 작품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다 귀족적인 여기(餘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삶의 현장에서 애써온 민중의 숨결이 역력하다.이것들은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옮아가면서'신들림'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고,'신이 나면'규칙을 뛰어넘어 새것을 만들어 가는 창의성을 보여주고 있다.

진흙같은 현실극복의지 가득

한국 특유의 가야금 산조나 사물놀이가 국내외 어디에서 공연되더라도 박수갈채를 받는 까닭은 사람의 혼과 현(絃),또는 타악기의 소리가 혼연일체가 되어 듣는 사람의 넋을 빼앗기 때문이다.미국의 인류학자인 오스굿 교수가 한국 음악을'동

면하는 곰의 조용함과 성난 호랑이의 사나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 것은 남도지방의 무속 음악인 시나위 가락을 장단이라는 틀에 넣어 연주한 산조(散調)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허튼 가락'이라는 뜻을 가진 산조에는 가야금 산조 뿐만 아니라 거문고.대금.해금.단소등에도 산조가 있지만,가야금 산조가 모든 산조 음악의 효시다.가야금은'삼국사기'에“가야국의 가실왕이 당(唐)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

으나 그보다 훨씬 이전 삼한시대부터 가야금은 있었다고 한다.가야금을 위한 곡을 작곡해 전수한 악사 우륵(于勒)이 가야국이 망하자 그것을 신라에 전했다.

거문고는 6개의 현 중 3개의 현,즉 제1현과 제5현,제6현에 안족(雁足)으로 버티게 하고 술대로 현을 치거나 떠서 연주하지만,가야금은 12개의 현을 매고 모든 현을 안족으로 버티어 세우고,주자가 왼손으로 줄을 눌러 농현(弄絃)을

하고,바른 손가락으로 현을 뜯거나 퉁겨서 연주한다.용의 울음소리와 같은 묵직한 거문고 소리에 비해 가야금 소리는 우륵의 표현대로'즐거워도 질탕하지 않고(樂而不流),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은(哀而不悲)'단아한 가락에 사람들은 매료된다

.가야금 산조는 느린 진양조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로 빨라진다.다른 악기의 산조에는 쓰이지 않는 휘모리와 단모리가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신들림'의 황홀경에로 이끌어간다.서양음악은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이 교대

되기도 하고 서로가 선명하게 대비되기도 하지만,한국의 산조 음악은 동일한 요소로 끈질기게 파고들어 점입가경의 경지로 이끌어 가서 진흙같은 현실을 유토피아로 이끌어가겠다는 현실 극복의 의지가 깃들여 있다.

자의식 속 멋과 흥을 드러내

단원과 추사는 조선후기 영.정조(英.正祖)때의 문예진흥 전성기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이다.단원은 후에 현감(縣監)을 지내기는 했으나 화원으로 중인(中人)계급에 속하였다.그는 세속에 때묻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일생을 신선처럼 살다 갔다

.그는 18세기 한국사회에서 무시되었던 서민 생활에 따뜻한 시선을 던져 건전한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풍속도에 담았다.일상생활의 단면들,그것도 어느 순간을 포착하여 긴장한 모습을 묘사하였다.단원 이후에도 풍속도가 이어졌지만 어느 지방

또는 어느 명절의 풍습을 전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을 따름이다.단원은 오늘날 사진 기술이 아니면 담아내지 못할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단원은 산수화에서 화조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그의 스승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단원을“우리 나라가 이제 내놓을 신필(神筆)”이라고 격찬했던 것은 특히 그의 신선도와 풍속화 때문일 것이다.

그의'신선취생도'나'군선도'에서 보는대로 옷깃이 바람에 휘날리는 신선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힘찬 생동감을 갖는다.하지만 신선도의 주제가 중국의 고사(故事)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나는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풍속도는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멋과 흥을 표상화했다.'행여풍속도'와 같이 비단에 엷은 빛깔로 뒷배경과 함께 그린 풍속도도 있으나 종이 위에,그것도 배경화를 생략하고 힘찬 필치로 그린'풍속화첩'은 서민생활의 생

생한 모습들이 25개의 화첩에 유감없이 남겨져 있다.씨름.무동.서당.벼타작.빨래터.기와이기등.25점이 다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에 묘사된 서민의 표정엔 하나같이 구김새가 없다.저'씨름'을 보라.화폭의 구도가 세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씨름하는 두 사람의 힘겨루기에 모여진 긴장이 뛰어나게 잘 묘사되어 있다.'무동'에서는 춤추는 젊은이의 손놀림과 옷자락,

그리고 향피리 주자의 볼에서 힘찬 가락이 들려오는 것을 느끼게 하고'행상'에서는 부부로 여겨지는 남녀의 모습에서 건전한 가정상을 볼 수 있다.이러한 건전한 민중들이 수천년 한국역사를 계승한 주체들이다.

모질고 굳세게 헤쳐가라는 뜻

추사는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예에 뛰어났다.청나라의 당대 학자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연마한 그의 학문은 유교의 경학 뿐만 아니라 금석학과 선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던 대학자다.그가 돌아간지도 이미 1백40년이 넘었지만 우리

가 그를 마치 동시대인처럼 친밀감을 갖는 것은 주변에서 쉽게 그의 글씨를 접할 수 있는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그의 독창적인 서체에는 두번에 걸친 10년의 유배생활에서 불우한 운명에 맞서며 고뇌를 달래고 예도(藝道)로 삶을 표현하려

한 그의 위대한 뜻이 담겨있다.우리는 추사가 남겨놓은 서예작품에서 그가 예서(隷書)를 쓰는 방법으로 가장 높이 보았던 방경고졸(方勁古拙)의 정신,즉 모질고 굳세며 치졸한 듯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만나게 된다.

한국 서예의 역사는 우리 역사만큼 오래다.그러나 한국 서예는 오늘날까지 중국인의 서체만을 본으로 삼아 습득해 왔다.다행스럽게도 19세기에 들어서 추사가 나타나 한국 서예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섰으니 우리의 자랑일 수밖에 없다.물

론 추사체는 추사 개인의 천부적 창의성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고려말에 들어온 조맹부(趙孟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점차 조선화(朝鮮化)되는 과정에서 한호(韓濩)의 석봉체(石峰體)가 이뤄졌다가 그후 북학파들이 종래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학문적 분위기에서 추사체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연구

의 결실로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더욱 귀중하다.

추사의 작품들은 그 골격과 표정이 신기(神氣)를 갖고 있어 힘찬 생명력을 줄 뿐만 아니라 가야금 산조의 농현(弄鉉)에서 울려오는 청고(淸高)하고 고아(高雅)한 뜻이 감지되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까.추사의 필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문자기(文字氣)는 고압적 분위기의 현대사 한복판에서 모질고 굳세게(方勁) 삶을 헤쳐가라는 민족혼의 전달이라고 나는 믿는다.

조요한〈숭실대 명예교수.철학〉

<사진설명>

가야금 산조

가야금 산조는 느린 진양조에서 시작해 자진모리로 빨라지면서'신들림'의 황홀경으로 이끌고 간다.마치 진흙같은 현실을 유토피아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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