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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휴전 끝났다” … 12월 마지막주 여의도 대충돌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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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성탄절에도 여야의 대치 상황은 계속됐다. 25일 오전 국회의장실을 점거한 민주당 의원들과 당지도부가 비어 있는 의장석 옆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법안이 처리될 수 있도록 산타의 사랑이 국회를 비추길.”(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 “고난주간이다. 예수님도 다수결로 죽었다.”(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 아기 예수 탄생의 축복도 우리 국회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성탄절 휴전은 끝났지만 여야 모두 물러서지 않겠다는 전의만 가득하다. 이대로라면 국회는 29~30일께 파국을 맞는다. 여야 지도부의 고심도 깊다.

김형오 의장 “직권상정, 국민 원하면 할 것”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크리스마스인 25일 김형오(사진) 국회의장이 여의도의 한 교회에서 열린 성탄 예배에 참석했다. 기독교 신자이지만 의장이 된 이후 교회를 자주 찾지 못했던 그는 이날 답답한 심정으로 교회에 들어섰다. 예수 탄생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 날이었지만 입법부 수장인 그를 둘러싼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8일째 그의 집무실을 차지했고, 직권중재 시한인 24일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가 전날 기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상황이 자꾸 직권상정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날 기도에 매달렸다. 기도 제목은 바로 ‘지혜와 용기’였다.

예배를 마친 뒤 기자와 통화한 김 의장은 “너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걸 고집하면 큰 걸 잃는다는 걸 정치권이 왜 모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여도 야도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성탄 예배 때 뭐라 기도했나.

“오늘 교회에 가기 전부터 정말 많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도 내용을 다 말해줄 순 없다. 다만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한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의장으로서의 중재 노력은 이제 끝난 건가.

“현재 민주당이 대화 자체를 원천 거부하고 있다. 나는 대화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며 대화에 나서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어떤 부분이 가장 답답한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이 있다. 한발 뒤로 빼면 상황이 좀 더 잘 보이고 두 발 뒤로 가면 더 뚜렷이 보인다. 그런데 여야 어느 쪽도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으려 한다. 오로지 명분과 아집만이 남았다. 어찌 답답하지 않을 수 있나.”

-직권상정에 대한 결심은 굳혔나.

“나는 여전히 소신과 원칙에 따라 국회 운영에 임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야의 합의를 중시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떤 결론도 내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국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겠다.”

-여야에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싶은 것은.

“후세를 생각해 보자. 역사가들이나 정치권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지금 상황을 이토록 비싼 대가를 치러가면서 싸워야 하는 형국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얼마든 합의가 가능한 일을 싸움으로 끌고 간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나. 지금은 전 세계가 경제를 위해 협력하고, 난국 돌파를 위해 정치권과 정부가 손을 잡는 시점이다. 우리처럼 이렇게 ‘죽기 살기’식으로 싸우는 곳은 없다. 부끄럽게 생각하고 대화에 임해 달라.”

이가영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끝내 대화 안 된다면 국회법 따를 수밖에”
한나라, 법안 단독처리 강행 시사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성탄절이었던 25일에도 국회에 나왔다. 임태희 정책위의장, 주호영 원내수석부대표 등 다른 원내 지도부도 함께였다. 한나라당으로서는 협상 시한(25일) 마지막까지 대화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하지만 휴일 등원은 ‘성의 표시’였을 뿐 여당 지도부 내에서는 법안 단독 처리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홍 원내대표는 기자들을 만나 “내일도 협의 처리를 위해 노력하겠다”면서도 “하지만 끝내 원내대표 회담이 안 이뤄지면 국회법이 정한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홍 원내대표는 통화에서도 “민주당 내부 사정이 강경해 (원혜영 원내대표도) 어디 ‘협상하자’고 나설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따라 홍 원내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날 단독 처리할 법안의 규모와 처리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이 중 법안 처리 규모를 놓고는 “단독 처리 후 ‘역풍’을 고려해야 한다”는 당내 의견 때문에 “그간 추진해 온 법안 중 이번엔 절반인 50여 개만 연내 처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흘러나왔다.

이와 관련, 홍 원내대표도 “다시 검토하면 100개 미만의 법안이 남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2차 검토를 아직 실시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논란이 되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 법안 ▶방송법 등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비겁자 응징 법안’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살리기 법안”이라며 처리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한편 여당의 단독 처리 시기는 29~30일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많았다. 홍 원내대표가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처리할 법안들을 추려 일요일(28일)께 기자간담회를 열겠다”고 말한 데 따른 예상이다. 하지만 주호영 부대표는 “아직 시기와 관련해선 결정된 게 없다”고 강조했다. 처리 일정 공론화가 직권상정 결단을 못 내린 김형오 국회의장이나 “결사 저지”를 외치는 민주당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 원내대표도 처리 시점을 묻는 질문엔 “국회의장은 설득 대상이 아니다. 더 두고 보자”고만 답했다.

남궁욱 기자


“점령군, 포로 대하듯 그런 대화엔 못 응해”
민주당, 국회 점거한 채 결의 다져

“국민과 함께 만든 민주주의의 후퇴와 인권 침해를 막 는 투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가 25일 “민주당은 성탄을 국회에서 맞는다”며 꺼낸 성탄사였다. 사흘간의 ‘크리스마스 휴전’ 마지막 날 민주당은 대화 가능성을 사실상 접어둔 채 직권상정에 대비해 한나라당과 김형오 국회의장을 향한 각 세우기에 주력했다. 원 원내대표는 “점령군이 포로를 대하듯 법안 처리 시한과 대화 가능 시한을 정해 놓고 주는 기회에는 응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원 원내대표는 24일 민주당 문학진 의원 등에 대한 국회사무처의 고발에 발끈했다. 원 원내대표는 “문 의원은 내 지시 아래 입장을 마지막으로 시도하기 위해 해머로 문고리를 뜯었던 것”이라며 “피고발인에 지시자인 원혜영 석 자를 넣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경호권을 불법 가동한 한·미 FTA 상정은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 의원들의 노동법 날치기보다 더 도가 지나친 사태”라고 비판했다.

서갑원 원내수석은 “국회 경위·방호원들이 야당 의원들을 사찰하고 있다”며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이날 국회 민원 안내실의 한 방호원이 민주당 의원들의 국회 출입 시간을 기록하다 서 의원의 눈에 띈 게 발단이었다. 서 의원은 “권위주의 시절에 벌어졌던 감시와 정치사찰이 이명박 정권과 김형오 국회의장 체제에서 재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세균 대표는 이날도 각 상임위 점거 현장을 격려 방문했다. 정 대표는 “김 의장은 직권상정 쿼터(할당량)를 넘어섰다”며 “국회 수장이라는 인식 없이 정권의 하수인처럼 하다간 국민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은 사흘째 “직권상정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며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을 찾았으나 의경들의 제지에 막혀 돌아섰다. 민주당은 김 의장의 직권상정 시점을 30일 전후로 보고 있다. 극적 반전이 없다면 민주당은 본회의장 점거에 나설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한 핵심 당직자는 “직권상정의 전 단계인 심사기일 지정이 (점거 돌입) 신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장혁·김경진 기자 , 사진=안성식 기자


단독처리냐 아니냐 …‘캐스팅보터’ 선진당
권선택 원내대표 “법안 사안별로 대응”

“한나라당은 일방적인 국회운영에 대해 사과하고, 민주당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 데 대해 사과한다.”

자유선진당(선진당)이 최근 정국 해법으로 내놓은 중재안 가운데 일부다. ‘입법 전쟁’에서 한 발짝 떨어진 채 양쪽에 점잖게 훈수하는 모양새다. 권선택 원내대표가 중재안을 들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쪽을 오가며 설득하는 등 물밑 작업도 열심이다.

선진당의 주가가 뛰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선진당이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가 관심이다. 결과에 따라 법안 단독 처리냐 아니냐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일종의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결정권자)’가 된 셈이다. 권 원내대표는 25일 전화통화에서 “양쪽 모두 막무가내식이라 해법이 없다”고 비판했다. 법안 처리 방식에 대해 선진당은 ▶순수 민생법안과 위헌 및 헌법 불일치 해소 법안을 연내 우선 처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등 여야 간 이견이 큰 쟁점 법안은 2009년 첫 임시국회에서 논의하자는 내용의 중재안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이 법안 처리를 강행할 경우 선진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물리력은 행사하지 않되 사안별로 대응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박선영 대변인은 “금산 분리 완화 등 당론에 어긋나는 법안은 반대 토론을 한 후 반대표를 던지고 북한인권법 등 당론과 일치하는 경우엔 찬성표를 행사할 것”이 라고 말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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