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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준, “하는 짓은 싸가지 하지만 … 안아주고 싶은 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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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시청률 5%대의 드라마. 출연하는 배우로서는 맥 풀리는 일이다. 하지만 KBS 월화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이기적인 속물 PD 손규호 역을 맡은 엄기준(32)에게서 그런 기색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럴 법하다. 주인공은 지오(현빈)와 준영(송혜교)인데, 매회 끝나고 나서 “규호 분량 좀 늘려주면 안 되냐”는 시청자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현빈 나온다고 해서 틀었는데 의외의 발견을 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그리스’등으로 뮤지컬계를 주름잡던 스타였긴 하지만 TV 입문은 불과 3년차. 2006년 단막극으로 데뷔해 ‘김치치즈스마일’‘라이프특별조사팀’에 이어 세 번째 작품에서 톱스타 현빈·송혜교 못잖은 시선을 끌었다는 건 분명 성과다.

극중 규호의 별명은 ‘시청률 제조기’다. 그에게 드라마는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청률만 잘 나오면 철학 같은 건 어찌 돼도 좋다. 열 명 중 아홉은 그를 “이기적이고 재수 없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욕한다. 남에 대한 배려, 팀 화합의 개념도 없다. 자기 좋다는 신인배우 해진(서효림)한테도 이런다. “하룻밤 잤다고 착각하지 마!” 참, 대체 그 속에 뭐가 들어앉았는지 궁금해지는 타입이다.

엄기준 역시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땐 ‘그냥 나쁜 놈’인 줄만 알았단다. “의아하죠. 현실에서는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들 응원해주시니.” 미안한 얘기지만 엄기준의 표정을 보면 당신, 진짜 성격도 규호 닮은 데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규호 입가에 상주하는 비웃음, 그 트레이드 마크가 맘만 먹으면 바로 현실 속 그의 입가로 옮겨올 것만 같아서다.

하지만 규호가 계속 이죽대기만 했다면 그냥 인상적인 악역이나 ‘감초 조연’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사실 속은 여리고 약한데 다치기 싫어서 강한 척하는 사람이죠. 그런 속내가 점점 느껴지니까 왠지 안아주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요.”

‘안아주고 싶은 나쁜 놈’, 그게 규호다. 해진과의 사랑에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참 예뻤다. 키스 장면을 찍는 해진에게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고 “키스신 한 번에 가라”고 윽박지를 때, 빗방울이 떨어지자 웃옷을 벗어 해진과 함께 쓰고 뛰어갈 때 규호라는 인물은 악역의 전형성을 벗어나 풍성해졌다.

“아직 방영 안 됐는데, 해진과 이별을 결정하는 대목에서도 규호는 참 규호다워요. 마지막 인삿말이 ‘좋은 배우 되라. 지금 얼굴 좋으니까 나중에라도 뜯어고치지 말고’거든요. 그리고 나서 해진이 머리를 넘겨주면서 핀을 꽂아주는데, 저절로 막 눈물이 떨어지더군요. 뚝, 뚝, 뚝 이렇게요.”

‘그들이 사는 세상’은 1998년 ‘거짓말’로 ‘한국 드라마의 문법을 새로 썼다’고 평가받은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의 합작품이다. 시청률은 저조하지만 이번에도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과 인물 간의 섬세한 연결이 호평을 받았다.

“배신 없죠, 출생의 비밀 없죠, 신데렐라 얘기도 없잖아요(웃음). 대신 노 작가님 대사는 가슴에 와닿는 생명력이 일품이에요. 극중 서우(김여진)의 대사에 ‘바쁘다고 해서 안 외로운 거 아니고 돈 많다고 해서 안 외로운 거 아니다. 인간은 다 외로워’라는 게 있는데, 제가 꼽는 ‘베스트 대사’죠. 어디에 살건, 누구건 간에 사람은 외로운 존재죠. 작은 일에 토라지고, 또 작은 일에 기뻐하고…. 인생은 그런 거다, 별 거 없다, 환상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따뜻한 드라마예요.” 

글=기선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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