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옆집 여자를 왜 힐끔거려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관련사진

1971년 파월 기술자들이 시위 도중 KAL빌딩을 점거하자 기동경찰대가 출동해 시위자 일부를 연행했다.

이코노미스트 사실 1966년 중반기부터 파업의 징후는 포착됐고 7월 13일 건설업체들이 진출했던 캄란기지 공사장에서 한국인 노무자와 필리핀 노무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한 것이 심상치 않은 파업의 서곡이었다. 이미 공개된 내용이지만 현대건설이 미 해군 기지인 캄란만 준설공사를 수주한 것이 66년 1월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불과 6개월 만에 발생한 스트라이크였다.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장기영 부총리, 파월 노동자들 파업하자 ‘계약 위반’이라며 호통

그러면서 7월 30일에는 한진에서도 불상사가 발생해 파업 주동자 14명을 해고와 동시에 강제송환까지 했지만 10월이 되자 미국 비넬사 소속으로 파월했던 한국 기술자 45명이 24시간 노동 강요에 반발해 귀국하는 사태가 또 발생했다. 정부는 인력수출이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데 심각성을 느끼고 곧바로 관계관들을 급파해 실태파악과 파업 주동자들을 해고시키는 강경책을 썼지만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부총리를 중심으로 임금이 낮은 한국 기업들에는 각별히 신경 써서 지도감독을 철저히 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66년 연말 재외공관장 회의를 통해 ‘우리 근로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국가 체면에 먹칠을 하고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다소 다듬지 않은 언어를 써가며 단호하게 못을 박기도 했지만 몇몇 기업체 현장에서는 마찰이 계속됐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진상사의 조중건 상무는 군 부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노무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그땐 한국군도 전부 미군에게 빌려 쓰는 셈 아닙니까. 침대도, 자동차도, 총까지도 말이지. 그렇다고 당신들도 빌려 쓰는데 빌린 거 우리도 좀 빌리자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린 민간인인데. 솔직히 우리 회장이나 나나 진심으로 노무자들 처지를 걱정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군부대로 뛰어다니면서 부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일하려고 온 사람들 아니오?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필요한 건 준비해가지고 와야 하는 게 원칙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정말 회장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 뛰어다녔어요. 그래가지고 이범준 사령관에게 40명씩 들어가는 천막도 50여 개 빌리고 야전용 침대까지 빌렸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침대생활 할 때가 아니잖아요. 허리 아플까 봐 등받이까지 다 빌렸다구요. 그러니까 노무자들이 필요한 건 거의 준비를 해준 셈이에요.”

파업 불씨는 외국 업체와 임금 차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상철 대사도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한진상사 노무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것도 가만 생각해 보면, 물론 해외진출 경험이 없다 보니까 그랬겠지만 그때 한진이 처음 자리를 잡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날아왔는데, 비가 쏟아져도 천막이 있어요? 제대로 된 노무자들 숙소나 막사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가지고 조중훈 사장이 특별히 부탁도 해오고 조중건씨는 현지에서 쫓아다니고 그랬는데, 우리 군에서 쌀도 주고 외곽지대 경비도 서 주고 물까지 주고. 군대에서 그렇게 지원을 많이 해 준 겁니다.”

-민간업자인데도 군에서는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한 셈이군요.
“그때는 군관민이 따로 없어요. 다 애국자지. 민간인도 애국자, 군인도 애국자. 조국 근대화를 하겠다는 그런 정신이 아주 투철해서 작전에 지장만 없다면 흔쾌히 빌려줬어요.”

결과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어느 기업을 막론하고 한국 노무자들의 파업 이유는 일부 근로조건이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역시 임금에 있었다. 현지 공관에서는 포괄적으로 ‘처우문제’라고 보고했지만 당시 국내 노무자 임금이 월 평균 100달러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많은 노무자가 월남 러시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임금이 얼마였든 그것은 아무런 기준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외국 업체 소속으로 나온 노무자들과 비교를 했다. 예를 들어 캄란 준설공사만 해도 미국, 일본, 호주 등 7개국에서 21척의 준설선이 작업하면서 받는 임금이 한국 업체 소속으로 나온 노무자들과 200달러에서 400달러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을 강력히 제기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현황까지 들고 나오자 정부로서는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신상철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최대한 신속히 수습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도록 주문하면서 모든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태를 파악해 보고하라 했던 것이 정부의 당혹감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 때문에 파업현장으로 나간 신 대사도 애를 먹었다면서, 그러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애국심에 호소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더라고 했다. 그만큼 정부의 대외 인력수출이 주먹구구식이었고 무원칙이었다는 얘기였다.

“폭염이 쏟아지는 머나먼 월남 땅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전쟁의 화염 속으로 달려온 여러분은 누구 못지않은 애국자들이다. 대통령께서도 여러분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계신다. 모든 것이 어려운 여건에서 오직 잘살아 보자는 염원과 국가의 경제부흥을 위해 땀을 흘리는 여러분한테 결코 헛된 노력이 안 되도록 대사인 내가 모든 노력을 다해 여러분 입장에 서겠다. 이곳에서 여러분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하면 그동안 높은 평가를 받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온 한국인들이 월남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겠느냐. 여기서 파업은 한국하고 근본적으로 다르다. 처음으로 외국에 대규모 인원이 진출을 했는데 모범이 돼야지 이래가지고는 회사도 클 수가 없다. 물론 당신들이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 밤낮없이 보초를 서 주고 경호를 해 주는 우리 장병들의 노고도 생각해 보자. 장병들은 여러분보다 훨씬 못한 보수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근무하고 있지 않으냐. 처우는 분명히 좋아질 거니까 이런 일(파업) 하지 말자….”

현장의 위기감과 달리 정부 일각에서는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아예 장기영 부총리는 격노했을 정도라고 했다. 그로서는 그랬을 것이다. 국가경제를 위해 기업들의 월남 진출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지만 노무자들도 저마다 달러를 벌어 가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호소가 있어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월남 정부와 ‘경제각료회의’를 정례화하자고 주장했을 만큼 열정을 쏟았는데 파업이라는 집단적인 반발이 일어나고 했으니 배신감도 들지 않았겠는가.

사실 장 부총리는 경제부흥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67년 10월 3일 포스코 건설을 둘러싸고 외자도입 문제가 얽혀 전격 사임했지만 그가 파업 때문에 여러 날 고민할 때 대사에게 고함을 친 에피소드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당시 신상철 대사는 장 부총리의 솔직한 심정을 들을 때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으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큼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장 부총리는 노무자들이 같은 한국인들이니까 정보 교환이 빨라서 임금 격차를 금방 알게 되겠지만 그것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는 것은 억지라면서 고함을 치더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얼마 받기로 계약을 하고 갔는데 계약할 때는 좋다고 도장 찍어 놓고 거기 가서 소란을 피운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오! 외국 업체하고 왜 비교를 해요! 비교를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닙니까? 사내자식이 바람 피우는 것도 반드시 비교를 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마누라하고 남의 여자를 비교하니까 저 여자가 더 예쁘고 서비스도 더 좋은 것 같거든! 그러니까 쌈질하고 머리통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니오! 비교할 걸 해야지, 한 번 도장 찍었으면 그걸로 운명이다 하고 살아야지, 도장 찍었으면 운명이 결정된 건데 옆집 여자를 왜 힐끔거려요! 서양 여자(외국업체)쳐다보고 비교해 봤자 말짱 헛일이니 곁눈 팔지 말고 제발 우리 처자식 행복하게 해 줄 생각 좀 하자고 설득 좀 하세요!”

신 대사는 장 부총리 얘기를 듣고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한마디 했다가 더 심각하게 돼버렸다면서 웃었다.

“도장이야 이혼할 때 찍는 거지 결혼할 때야 어디 찍습니까. 밖에 나와서 곁눈질을 해 보니까 결혼 잘못했구나 싶어서 파업이라도 하자는 것 같은데, 너무 심려 마십시오. 잘 수습될 겁니다.”

“곁눈질했으면 벌써 바람이 든 거예요! 더 전염되기 전에 파업하는 자들은 무조건 격리해 추방하세요!”

사실 같이 굶을 수는 있어도 차별에 대한 인내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신 대사는 임금 차별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체결한 계약조건도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는 주장까지 하더라고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파업이 일어나면 좋은 내용은 한 가지도 나오지 않게 돼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의 활동이 대단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정부가 기대했던 것처럼 월남 시장이 한국 경제부흥의 촉매제 역할을 넉넉히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솔직히 그 이면에는 적지 않게 누적돼 있는 문제점들을 숨긴 흔적도 곳곳에 있었다.

노무자들 보호할 내부장치도 없어

관련사진

photo

인천항에서 월남에 보낼 화물을 싣고 있다.
월남전 특수경기로 한몫 잡은 건설회사가 그 후 중동 진출의 길을 열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는 노무자들의 희생을 요구한 사안들이 상처의 딱지처럼 남아 있었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의 약자인 노무자들을 계약이라는 사슬로 묶어 반신불구가 되어도 계약에 따른 보상만으로 모든 것을 처리했던 기업들의 사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경제부흥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노무자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채찍은 기업만이 아니라 정부도 함께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10달러면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전거 한 대를 사줄 수 있는데 몇 백 달러까지 차이가 나는 임금을 받아야 하는 모순과 불합리 속에서도 항변 한번 하지 못한 채 탄식과 울분을 삭이며 견딜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강제 소환한다는 정부의 고압적인 눈초리와 국가의 경제부흥에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회유 때문이었다는 것은 그 시절의 노무자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땀으로 찌든 티셔츠 하나로 몸을 가리고 그늘을 찾아 단꿈을 꾸는 그들에게는 합당한 대우와 인간적인 대접만 있으면 행복이었을 텐데 그마저도 보장해 주지 못했던 기록들이 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그 시대의 분명한 아픔이었다. 대한민국 국회는 1965년 8월 13일 임시국회를 열어 김성은 국방장관의 파병동의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에게 닥쳐올 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윌남을 수호하지 못한다면 연쇄적으로 일어날 중공의 침략전은 영구히 막을 길이 없을 것이므로…윌남전을 승리로 이끌게 함으로써 공산군의 침략 기도를 분쇄하고 자유제국의 공동방위 노력을 촉구하여야 하겠으며….’

동의안에서 보듯 박정희 정부로서는 경제부흥이라는 절실한 과제를 안고 있었으면서도 비록 파병동의안이라고는 하지만 군사안보는 있어도 기업들과 노무자들이 가져다줄 경제안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인식이 그런 정도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군납, 기업들의 송금, 파월 기술자 수익 등으로 약 6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성과를 얻으면서도 파월 기술자들은 일체의 법적인 보호 장치나 지원에 관한 제도적인 혜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시행착오가 어느 쪽에서부터 잉태했건 정부가 파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게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게 돼 있었고, 파병 목적은 분명해도 정작 우리 노무자들을 보호할 내부 장치는 전혀 없었다는 얘기였다.<계속>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J-HOT]

▶ "어수룩한 촌로 아닌 머리 회전 빠른 前 세무공무원"

▶ 김초롱? NO, 크리스티나 김! 씁쓸한 아메리칸 걸의 변심

▶ 한영실 숙대총장 "축구하고 군대가는 여대생 만들것"

▶ [칼럼] MB가 셀까, 망신당한 농협이 셀까

▶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 공부못했던 연산군의 비극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