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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찾아서>20.명암 寒山寺 下.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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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숲속 오막살이에

無所有의 진리가… 나의 띠풀집(茅屋)

들사람 사는 오막살이 집이라

문앞에는 차마(車馬)의 시끄러움 없네.

숲이 깊숙해 한낱 새만 모이고

시내가 넓어 본래 물고기 있었다.

산과일은 아해 데리고 나가 따고

물가의 밭은 아내와 함께 맨다.

이 집안에 또 무엇이 있는가

오직 책상 하나, 책이 있을 뿐이네.

중국 사천(四川)성 서남사대 출판부가 펴낸 ‘중국 역대 선시선’에 실린 한산시의 하나다. 이 시는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밑에서 (술담글)국화를 따다가 무심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구절과 함께 유유자적을 대표하는 선시다.

선의 실천 목표는 ‘낙도(樂道)의 생활’이다. 이 점이 바로 선종이 고행을 강조하는 다른 불교 종파와 다른 점이다.

살림은 청빈하고,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무소유다. 구름과 새들조차 유한자재(悠閑自在)한 가운데 오직 은자의 전원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을 읽고 있을 뿐이다. 자연이 주는 은혜를 감사하며 자유로운 마음의 세계에서 오직 진리(책)를 벗하며 산다. 앞의 시냇물은 희고 맑아 한 티끌도 없는 선심(禪心)이다.

한산은 ‘층층바위 밑에 산다(重巖我卜居)’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그대 부자들에게 내 한마디 부치나니

헛된 이름은 진정 무익할 뿐이니라.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사는 한산다운 한마디다. 선사들이란 하늘로 솟구치는 마음을 가진 정신적 거장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행복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담준론의 관념적 유희나 공허한 논리가 아니다. 선은 신이나 영혼, 무한한 사후(死後)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비밀(사물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선의 핵심은 일체의 법과 더불어 살면서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생활불교’다.

특히 조사선은 현실 자체와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을 긴밀히 해주길 바란다. 선은 인도의 요가가 근원이지만 선불교는 중국민족의 전통적인 현실주의가 새롭게 창조해낸 ‘중국불교’다.

선과 요가는 다같이 불완전한 의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다. 그러나 요가가 불가해한 구성·신비성·복잡한 테크닉의 인도적(印度的)사변을 내포한데 비해 선은 뛰어난 지성과 의지력에 호소하는 단순성·직접성·실천성·일상성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선과 요가의 차이점이다.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선문답은 칠흑같은 어둠속을 밝혀주는 불빛처럼 삶에 축복을 준다. 선은 신앙적으론 선불교, 사상적(철학적)으론 선사상, 학문적으론 선학이라 한다.

유의할 점은 선에서는 어떠한 전제도, 고정관념도 용납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은 철학적 명상, 종교적 수행들과 구별되며 부처까지도 배격한다. 선사들은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절대부정’을 서슴지 않는다.

한산시의 전형은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이다. 이밖에 세상과 승려에 대한 비판, 불교적 교훈, 여성의 변덕을 노래하기도 했다. 모두 내용은 허망한 삶을 깨우쳐 도(道)를 구하라는 것이다.

다시 명암 한산사로 들어가 보자.

그 지형은 삼면으로 바위와 동굴이 둘러치고 있는 삼태기 모양이다. 출입구는 동쪽이다. 우선 한산과 습득은 85년 노인회에서 건립했다는 조그만 바위 위의 ‘한습이대사 기념탑(寒拾二大士記念塔)’에서 만날 수 있다. 3층탑인데 옆에 한산의 입상(立像)이 있다. 동굴안에도 또 다른 한산·습득상이 있다.

산문 왼쪽에는 높이 18m나 되는 9층 철탑 ‘한산탑’이 있다. 주지 예결비구니가 동굴 안에서 참선정진을 하는데 현재의 탑자리에서 5색 채광이 비쳐 그 자리를 본래의 한산묘탑자리로 추정, 탑을 건립했다고 한다. 한산묘탑은 오래전 유실돼 그 지점을 아는 사람이 현재 없단다.

대웅전 위의 동굴은 청나라 건륭제의 왕사(王師)였던 제소남(齊召南)이 은거했던 곳이다. 그의 친필이라는 ‘일광(日光)’두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동굴에는 ‘성적장존(聖跡長存)’이라는 편액과 함께 한산상이 봉안돼 있다.

조양암(照陽庵)이라는 동굴암자에도 역시 제소남의 친필인 ‘고대(高大)’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속칭 잉어바위라 부르는 수룡당이란 동굴암자에는 풍간·한산·습득 삼은상(三隱像)을 만들어 봉안했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현실주의자들이라 전설·민담·고사등을 형상화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하기를 좋아한다. 어딜 가도 그렇지만 명암 한산사도 한산과 습득의 전설을 형상화해 놓은게 수없이 많다. 가위 형상화의 귀재들이다.

나는 애초에 습득물이었으니

내 이름도 우연은 아니다.

〈중략〉

몇살이냐고요

황하가 맑아지는걸 여러번 보았소.

습득의 시다. 역사 이래로 황하는 맑아져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끝 구절은 습득과 한산의 생명이 세계의 생성보다 더 오래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모진 역사의 풍파를 딛고 오늘 한습동에 다시 살아난지도 모른다.

습득은 ‘황하가…’와 같은 역설적 비유를 즐겨 쓴다. 궁극적인 교설, 출세간적 비유로 사용되는 역유(逆喩)는 선가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세간법적인 비유나 방편교설은 순유(順喩)라 한다.

습득의 ‘우물밑 티끌’이라는 시는 역유의 백미다.

우물밑에서 티끌이 일고

높은 산위에 흰 물결 인다.

돌아낙 돌아이 낳고

거북의 털이 7치나 자랐다.

우물밑 티끌,산위의 물결도 역설이다.

그러나 거북의 털은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내보인 역설의 극점이다. 거북은 털이 없고, 토끼는 뿔이 없다는건 세상진리가 아닌가. 선학은 허망함조차도 없는 유·무의 초월을 표현하고자 할 때 ‘거북의 털, 토끼의 뿔(龜毛兎角)’을 곧잘 사용한다. 선림(禪林)이 자주 쓰는 이같은 역유는 수없이 많다.

역유는 중국문학의 최고전인 시경에 나오는 진지한 연정(戀情)을 드러내는 ‘착란의 표현’을 그 근원으로 한다.

선가는 절대긍정을 얻기 위한 부정법으로 역유와 역설(逆說)을 곧잘 활용한다. 한국불교 조계종 성철 전종정은 83년 12월 원적(圓寂)한 송광사 방장 구산선사 다비식에 보낸 추도법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산, 당신은 이제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무례한(?)추도사다. 죽은 사람에게 어서 빨리 지옥으로 가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추도사는 “구산, 당신의 그 큰 법력이라면 지옥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육도윤회하고 있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이오”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결과적으로 구산선사를 지옥의 중생까지도 구제할 수 있는 해탈도인으로 치켜세운 추도법문이다.

끝으로 한산과 습득을 만나고서 꼭 새겨두고 싶은 한가지는 그들의 우정이다. 초월의 세계를 사는 달인(達人)인 그들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심우(心友)를 필요로 했다.

이 점 때문에 그들은 철저한 인간적 면모를 지켰고, 선이 공허한 동문서답의 말장난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이란걸 보여줬다.

답사를 끝내고 나오다 명암앞 시냇가에 차를 세우고 얼굴의 땀을 씻었다. 3개월동안의 답사에서 본 가장 맑은 시냇물이다. 지금도 예와 다름없이 물고기들이 떼지어 노닐고….

사람의 마음은 산속 연못이나 계곡물 같은가 보다. 오랜만에 맑은 시냇물을 대하니 ‘산속 연못은 언제나 기꺼이 떠오르는 달을 맞이한다(山淵好月來)’는 글귀가 물속의 손끝에 와닿는다.

증명:月下 조계종 종정 ·圓潭 수덕사 방장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장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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