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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전인권 삼청동 자택에서 출소 후 첫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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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서울 삼청동 집의 현관문을 열면서 쇳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인영 엄마’. 인영은 전인권의 맏딸 이름. 다시 세상으로 나온 그는 “얘들 엄마와 재결합했다”는 깜짝 뉴스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가객 전인권 과의 3시간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마약류 관리 위반 혐의로 1년 형기를 마친 전인권이 지난 9월 6일 출소했다. 구속 당시 세간의 지독한 구설수에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가객을 맞이하는 상황은 전혀 호들갑스럽지 않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렇게 전인권은 조용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인터뷰는 서울 삼청동 끝자락에 위치한 자택에서 진행했다. 그는 동네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다. 블랙 진에 흰 와이셔츠, 블랙 재킷, 치렁치렁한 머리…. 모든 게 여전했으나, 트레이드 마크인 베르사체 선글라스를 벗었다. 출소 후 달라진 전인권을 기대한다면, 선글라스가 없다는 것이 그 첫인상이었다. 집까지 오르는 골목길의 계단은 오르막이었다. 그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서 전인권이 첫 마디를 꺼냈다.

“잘 살다 나왔어. 마약은 감방에서 끊었고.(웃음) 그런데 내가 나쁜 걸까, 사회가 나쁜 걸까….”

기자에게 말을 거는 건지, 혼잣말인지, 헛헛한 말투였다. 그가 다시 터벅터벅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만난 작은 약수터에서 약수 한 사발을 꿀꺽 마시고, “몸에 좋은거니 마셔보라”며 기자에게 권했다. 앞으로 그가 쏟아 낼 많은 말을 기대하며 기자는 ‘꿀꺽 꿀꺽’목을 축였다. 대문은 흰색이었다. 그 대문 왼편 위에 전인권 이란 영문 문패가 양각으로 새겨졌다. 시계는 오후 7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 시간 집에는 누 가 있을까. 자녀(대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가 아빠를 맞이할까. 아직은 아무도 귀가하지 않은 빈 공간일까. 전인권이 현관문을 열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인영 엄마”. 인영은 맏딸 이름. 그 뒤에 따라 붙은 호칭이 뜻밖이었다.

“나 애들 엄마와 재결합했어. (이혼) 6년 만에 합친 거지.”

노래든, 이슈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전인권이 초장부터 깜짝 뉴스를 전했다.

현관문을 열면서 부르던 호칭, “인영 엄마” 새로운 부부 관계 설정 중

사실 기자는 전인권의 부부 스토리를 잘 기억 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혼했고,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아내가 없는 전인권이 너무 익숙했고, 그 역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류의 얘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덤덤하게 재결합했다는 그를 보면서 그제야 “지금 그에게 누군가 있다면 좋겠구나”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6년 만에 얼굴을 본 거야. 그동안 와이프는 밖에 나가서 다른 인생 경험을 했지. 그렇게 서로 연락을 안 했어. 그래도 내가 없을 때는 저 친구(전처를 호칭)가 애들을 자기 집에 데려 가서 돌봐줬어. 면회를 온다는데, 처음엔 내가 화가 나서 거부했어. 시간이 조금 지나서 안양 교도소로 첫 면회를 왔지(그는 춘천-안 양-청주 교도소를 돌며 옥살이를 했다). 저 친구와 난 싸워도 5분이면 끝나는 스타일이야. 몇 년 못 봐도 바로 친해지고, 반가운 사람이 되는 거야. 정신적인 사랑은 내가 생각하기엔 참 좋은 거야. 가족이 그런 거지. 아이들이 좋아해. 표정이 밝아졌어.”

전인권은 2002년 이혼했다. 무명 가수와 여대생으로 만나 1982년 결혼, 20여 년 부부 생활을 했다. 이혼 즈음 전인권은 한 인터뷰에서 “결혼 초반엔 사랑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이후엔 아이들을 기르느라 참았고, 아이들을 웬만큼 키워 놓고 나니 (부부 관계의)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또 내가 워낙 말썽을 부리다 보니 더 참기 어려웠던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결론은 그렇게 났지만, 둘은 동반자였다. 전인권은 “아내가 내 노래를 좋아했고, 나의 세계를 잘 이해해 준다”며 이상형으로 꼽았다. 아 내가 전인권을 우직하게 챙기던 시절이 있다. 1999년 전인권이 마약류 단속 위반 혐의로 구 속됐을 때,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며 구명 운동을 펼쳤다. 당시 그녀는 “오직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이번 일로 절망하고 마음을 다칠까 봐 걱정이 된다. 가뜩이나 답답한 걸 싫어하는데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터질 것 같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기자는 지난 일들과 재결합 근황을 접하면서 전인권의 히트곡 ‘돌고, 돌고, 돌고’가 떠올랐다. 사람의 정이란 것은 돌고 또 도는 것인가. ‘전인권의 구속’이 다시 부부의 끈을 이은 것 도 새삼스럽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심하게 대했어. 결혼하면 권태기란 게 있고 그러잖아. 이혼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우리, (이혼의) 속사정은 거기까지만 얘기할까. 아내와 약속했어. ‘ 앞으로 바꿀 건 과감히 바꾸자, 당신도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해라, 나도 공부할게’라고. 다시 장난을 치며 살자고, 변화를 갖자고 얘기했어. (부 부 관계의) 새로운 스타일을 준비 중이야.”

애당초 삼청동 집은 재결합을 고려해 지었다. 이혼 후 마음이 너무 힘들었고, 아내와 다시 함께 살기 위해 이 집을 지었다. 전인권은 “집 사람이 나간 후 집이 휑하고 어둠침침해지더라”면서 “새집을 짓고 다시 뭉치자”는 말을 꺼냈다. 이혼 뒤의 그 제안을 아내는 거절했다. 재결합까지는 6년의 세월이 걸렸다. 법적인 재결합 절차를 밟을 것이냐고 물었다.

“글쎄, 생각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해. 우리 둘 다 그런 절차는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서. 저 친구가 혼자서 편하게 잘 놀아.”(웃음)

인터뷰 중간, 아내가 준비한 저녁식사가 차려 졌다. “남편이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했다”는 이유로 주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전인권이 입맛이 없다며 밥에 물을 말겠다고 했으나 아내가 만류했다. 전인권은 삼겹살 한 접시를 비웠다. 아내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아직은 (나와 있는 게) 어색한가 봐요. 그런 말은 안 하는데, 행동을 보면 알죠. 감옥살이 하느라 삶의 ‘감각’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농담도 잘 안 하고, 딴생각 할 때가 늘었어요.” 아내는 “감옥 생활의 여파가 남아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죠”라며 남편의 건강 상태를 자주 걱정했다. 결혼보다 어려운 게 재결합이라는데, 아내의 생각이 궁금했다.

“난 늘 지켜봐 왔어요. 집 밖에서 아이들을 만났고, 애들 통해 밑반찬을 늘 챙겼고요. 그런데 남편은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라, 그런 손길을 몰랐을지도 모르죠. 남편이 2년 전부터 (재결합) 사인을 보냈죠. ‘다 해줄 거니까 들어오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아무래도 혼자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우니까요. (잠시 침묵) 글쎄요, 아직은 과정이니까요. 잘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고…”

아내는 누룽지를 서비스했다. 집에 아내의 손길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앞으로 전인권은 자신의 세계에 더 신경 쓸 수 있을 것이다.

“좋아, 편안하고. 그런데 아내를 보면 가끔 마음이 아픈 거야. 벌써 아내 나이가 쉰둘이 됐고, 가끔 내가 못 참을 때가 있어. 앞으론 내가 놓치고 실천 못한 것들을 해야겠어. 뭐든 자세히 물어보고, 툭툭 장난스럽게 찌르고 말이야. 진실하게 애써 볼 거야.”

나의 가수 인생 30년을 판단해 달라 전인권의 심통, 그리고 변화…

그는 아내와 못했던 소통을 해보겠다고 말한 다.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 겸 전인권의 방에서 다시 ‘소통’에 들어갔다. 이번엔 ‘감옥살이’에 관해서, 그리고 전인권의 변화를 물었다. 전인권이 마약류 관리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그는 춘천-안 양-청주 교도소를 돌며 9월 6일 1년 만기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9월 4일은 가객 전인권이 1954년 서울에서 실향민의 3남 중 막 내로 태어난 날이다. 쉰 넷의 생일을 독방에서 보냈다.

“그런 건 억울한 게 아니지. 나 그런 거(생일) 엔 신경을 안 써. 나대로 살아갈 뿐이야. 불편 하냐, 불편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나가는 삶인 거야.”

안양 교도소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이 동시 수감돼 세계의 이목이 쏠린 곳이다. 전두환은 출소하면서 “여러분은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했다. 전인권의 출소 소감이 궁금했다.

“아니야.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데, ‘여러분은 죄 짓지 마시오’라고 했어. 나? 전과 5범의 개성을 갖게 된 거지. 앞으로 5년은 끊겠다고 약속할게.”

그는 네 번째 수감될 때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5년은 끊겠다”는. 다섯 번째 형기를 마치고도 같은 말을 한다. 영화배우 김부선은 전인권에겐 구속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법은 평등하다. 가수 전인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세상과 그만 부딪히고 조용히 지낼 법한데, 전인권은 또 세상과 부딪히려는 기색이다. 그는 죗값을 두고 심통이 난 상태였다.

“괜찮아. 난 양심에 솔직한 거야. 구속되면서 딸과 아들에겐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나, 걱정 했지. 우리 얘들이 속이 깊고 착해. 아빠는 최고로 멋진 사람이니 걱정 말라고 했어. 딸이 ‘아빠, 사랑해’라는 답을 해줘 고마웠지. 그런데 왜 자꾸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을 잡아가서 신문에 크게 내느냐 이거야. 노래만 부르고, 노래만 생각하면 좋겠는데, 자꾸 뭔가 움츠리게 만들어. 2심 재판에서 내가 ‘전인권 인생의 모든 것을 재판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했어. 최후 진술에서는 ‘세계적인 가수가 꼭 되겠다’고 했어. 약을 했다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고, 전인권의 가수 인생을 판단해 달라는 말이 잘못된 걸까. 나, 징역살이가 싫어, 이제는.”

한 음악 평론가는 “전인권의 절제되지 않은 생활은 노래방에서도 오직 자기 노래만 부르는 조용필과 비교해 많은 아쉬움을 준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약 하지 말고, 자기 관리를 하는 게 노래 인생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거기엔 세상도, 나도 할말이 없어.” 이럴때 전인권은 어린아이 같다. 그에게 옥살이가 건넨 변화란 게 있을까. 그는 “한 가지는 도움이 됐다. 날카로운 성격이 부드럽고 차분해졌다”고 했다. 독방에서 뭐가 가장 그립더냐고 물었다.

“그리움을 다 잊으려고 했지. 그래야 버틸 수 있는 거야. 감옥의 시간은 잘못 활용하면 굉장히 힘들어져. 내가 알아서 (그리움을) 막 피한 거야. 소리 지르고, 손 드럼(손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멜로디를 만드는 것)을 두드렸어. 그래도 힘들면 찬물로 샤워하고 그랬어.”

전인권은 중간 중간 하던 얘기를 멈췄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방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지” “나 또 잊어버렸네” “또 뒤집혔어” 라며 기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징역 독’이 아직 안 풀렸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일 년을 자동차 안에서만 지내는 거야. 차 안 에서 먹고 자고 볼 일을 보는 거지. 감옥은 그 보다 나쁜 상황이야. 풍경이 없고, 시커먼 곳 이니까. 감옥은 ‘모든 게 아니 된다’로 통해. 혼자 걸어가면 안 된다, 이 방 저 방 얘기하면 안 된다, 그런 규칙이 수십 가지야.”

내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 없다, 이번엔 젊은 가수들 야단을 쳐야겠다…

전인권은 늘 혼자 걸었고, 자유를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 삶의 태도를 보였다. 누가 음악을 가르쳐준 적이 없고, 독학으로 음악이란 걸 깨우쳤다. 그렇게 노래하는 전인권은 언제나 홀 로 걸었다. 그런데 옥살이는 “혼자 걸어선 안 된다”는 게 규칙이다. 그는 스스로 독방을 선택했다.

“독방은 차원이 틀려. 365일 불이 켜 있고, 정말 지독한 곳이야. 아직은 독방 생활에서 덜 풀렸어. 무지 외롭고 지루한 곳인데 그래도 이겨 나가는 재미가 있어. 스케줄을 잘 짜야 해. 12시에 일어나‘멍’을 잡다가 점심을 먹은 뒤 잠깐 눈을 부쳐. 그 다음 시간들이 고비야. 정말 지루하고 무서워. 그러다 오후 5시를 넘기면, ‘하루가 가는구나’라며 안심하는 거지. 독방에 앉아서 계속 곡을 썼어. 손 드럼으로 무릎을 두드리면서 멜로디를 암기했지. 좋은 노래는 가사에 멜로디가 따라붙는 거야.”

그는 옥살이 도중 가진 인터뷰에서 “출소하면 한국이 깜짝 놀랄 음반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사람들은 ‘과연 전인권답다’면서도, 그의 말을 심히 무게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 쓴 노래들이 정말 좋아. 록의 정신을, 좀 더 한국적인 리듬을 담을 거야. 내가 감옥 에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노래할 놈이 없어. 내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 없단 말이야. 가수가 딴 데 눈을 파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이번엔 야단을 좀 쳐야겠어.”

전인권의 새 음악을 세상이 몰라준다는 부담감은 없을까. “노래는 만들어 두면 흘러간다. 옛날 노래 중에 후진 게 있다. 그래도 지금은 지금의 전인권이 있을 뿐이다”는 대답. 외로 운 독방에서 노래만 생각했다는 사람이 만든 노래는, 특히 노랫말은 어떤 것일까. 그는 “사람, 삶에 관한 거야.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 을 담았다”고 했다. 전인권이 생각하는 사람답게 사는 방식은 무엇일까. 갑자기 그가 철금 성(쇳소리)으로 두 곡을 불렀다.

“내가 하나 묻고 싶어. 지금 만족하며 살고 있어? 아니지. 누군가를 만나도 뭔가 빈 것 같잖아. 외롭고 비어 있고, 늘 뭔가를 찾고 있잖아. 그러니까,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란 마음으로 살아 보자는 거야.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생각 해 봐.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 그런 걸 생각하는 거야.”

전인권의 묘비명에 담길 문구를 물었다. 한참 동안을 생각한 그가 답을 내놨다.

“전인권은 그냥 가수다”. ‘그냥’이란 말에는 음악에 대한 전인권의 어린아이 같은 열정이 담겼다. 인터뷰 말미, 전인권이 기자에게 부탁 하나를 했다. 엉뚱하거나 별세계에 사는, ‘기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평범함이 그리웠던 것일까. 다시 세상으로 나온 그는 아내와 재결합으로 오랜 세월 거리를 두던 평범함,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취재_여성중앙 승민 기자 사진_임효진(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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