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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초 대학생들이 마시던 양주 ‘캡틴큐’를 아시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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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그이를 아시나요. 그이의 이름은 ‘기타재제주’랍니다. 그이를 아신다면, 그럼 그이가 벌써 18년 전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겠죠. 까마득하게 잊었을 테니까.

그때, 우리가 가난하고 억압받을 때, 그이는 가보지 못하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주었지요. 위스키ㆍ브랜디ㆍ럼ㆍ보드카…. 말로만 듣고 어쩌다 훔쳐보기만 했던 그 세계로, 그이와 함께 갔던 밤들은 들뜨고 행복하고 요란했지요. 다음 날 몸이 탕진하고, 머리와 속이 뒤틀려 환장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답니다. 어차피 그이 없인 갈 수 없었던 곳이니까요.

기타재제주(其他再製酒)! 1990년 이전까지 한국의 술은 주세법상 양조주ㆍ증류주ㆍ재제주로 분류됐다. 양조주는 발효주이고, 증류주는 발효시켜 얻은 알코올을 증류하거나 희석시킨 것이다. 재제주는 한가지 술에 다른 술이나 첨가물을 섞은 것으로 합성맥주ㆍ합성청주ㆍ인삼주, 그리고 기타재제주가 여기에 포함됐다.

합성맥주, 합성청주? 맥주나 청주에, 소주나 주정을 섞은 것이라고 나오는데 옛날에 그런 술이 있었던 모양이다. 인삼주를 왜 양조주 아닌 재제주에 포함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재제주는 쉽게 말해 두 종류 이상의 술을 섞은 것이다. 그럼 기타재제주는? 맥주와 청주 외의 술, 즉 위스키ㆍ브랜디ㆍ럼ㆍ보드카 등의 원액에 소주나 청주를 섞은 것이다.

단, 위스키와 브랜디의 경우 원액 함량이 제품 전체 알코올의 20% 이상이 되면 증류주로 구분돼 주세가 높아졌다. 결국 기타재제주라는 게, 20%도 안 되는 원액(원액 자체가 싼 술인 럼이나 보드카는 20%를 넘기도 했다)에 싸구려 알코올을 채워 넣은 싸구려 술인데, 양주는 수입이 규제돼 있고 또 비싸서도 못 먹던 70년대 후반부터 10년 동안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위스키가 들어간 ‘베리나인’, 브랜디가 들어간 ‘나폴레온’, 보드카가 들어간 ‘하야비치’, 럼이 들어간 ‘캡틴큐’ 등이 ‘기타재제주’라는 이름을 라벨에 붙인 채 불티나게 팔렸다. 그중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았던 건 ‘캡틴큐’였다. 아마 단가도 가장 쌌던 것 같다. 1980년 롯데주조가 내놓은 이 술은 바로 다음 해 판매량이 1000만 병을 넘겼다. 그러다가 차츰 시들해지더니 언제부턴가 아예 애주가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 ‘캡틴큐’가 2003년 개봉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감독)에서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20대 총각 원상(박해일)은, 애인이 40대 유부남 윤식(문성근)과 연애에 빠지자 그녀와 헤어진다. 그 뒤 다른 여자에게 연정의 싹이 트려 하는데, 그 여자마저 윤식과 잠자리를 함께한다. 윤식에게 두 번이나 여자를 빼앗겼으면 윤식이 더없이 미울 텐데, 원상은 묘하게도 그를 따르면서 그에게 다가간다. 왜 그럴까.

윤식은 노회하지만 열려 있는 반면, 원상은 순수하지만 닫혀 있다. 원상은 아직 윤리적인 잣대에 갇혀 있다. 그래서 세상이 자꾸만 자기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윤리를 어기면서도 윤리와 충돌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윤식은 미우면서도 부러운 존재일 수 있다. 노회한 만큼 속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윤식에게 압도돼 그에게 더없이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원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쟤가 어쩌자고 저러나’ 하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원상에게서 복수를 벼르는 듯한 위험한 기운을 드러내면서 끝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모호한 수준의 반전에 있는 게 아니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윤식의 집에서 파티가 있던 날, 원상은 캡틴큐를 사온다.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처음 산 양주”라고 한다. 윤식은 원상이 사 온, 먹다 남은 캡틴큐를 혼자 홀짝홀짝 마시다가 직접 사기까지 한다. 윤식ㆍ원상 둘이 윤식 집에서 캡틴큐를 마실 때 윤식이 말한다. “이 싸구려 술, 자꾸 먹게 된단 말야. 근데 괜찮아.”

캡틴큐가 어떤 술인가. 앞에서 말했듯 70~80년대 가난과 억압이 미처 다 누르지 못한 낯선 세계에의 동경, 그 상징인 기타재제주, 그중에서도 최고의 스타 자리를 누렸던 술이다. 1년산 럼이 조금 들어갔을 뿐이지만 ‘럼’이라는 한 글자가 불러오는 카리브 해의 관능과 자유의 바람, 그것이면 충분했다. 원상처럼 가난한 대학생들은 엄청 마셨다. 맛? 그건 맛이 아니라 문화였다.

마흔을 갓 넘었다고 말하는 윤식은, 대학 때 캡틴큐를 마셨을 세대다. 하지만 프랑스 유학을 했다는 그는 전에 이 술을 마셔보지 못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이 싸구려 술 옛날에 무지하게 마셨지, 다시 마시니까 또 괜찮아”라고 말했다면 어떨까. 원상의 술, 좀 더 확장해 원상의 세계를,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향수의 세계 안에 포섭시켜 버리고 마는 권위적인 말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윤식의 말은 “이 싸구려 술, 자꾸 먹게 된단 말야, 근데 괜찮아”였다. 이 말에 권위나 향수는 없다. 대신 거기엔 궁금함이 있다. 싸구려 술이 왜 괜찮지? 싸구려인데도 관능이 있나? 너는 그걸 아니? 대충 이런 식으로 이어질 법한 말들이 생략된, 그 표현엔 상대방과 상대방이 속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런데 원상은 윤식보다 가난한 세계에 산다. 윤식의 말은, 영화의 이면에 숨어 있던 ‘관능과 자유’ 대 ‘헌신과 약속’ 이라는 대립항을 슬며시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가난한 시대는 관능과 자유를 마음 놓고 추구할 수 없다. 그 시대는 헌신과 약속을 요구한다. 원상의 하숙집 딸은 병든 아버지와 남동생을 부양하며 힘들게 산다. 그녀에게 연애는 관능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그건 평생토록 헌신하겠다는 약속이어야 한다. 원상은 그녀와 섹스한 뒤 그녀가 결혼을 요구하자 단호하게 그녀를 버리고 윤식의 세계로 옮겨간다.

영화는 묻는 듯하다. 우리가 그렇게 윤리를 무시하고 관능에 몰두해도 될 만큼 가난한 시대에서 벗어났느냐고. 우리가 진정 그만큼 고상해졌느냐고. 그와 동시에 영화는 답하는 듯하다. 여기서 계속 살아온 이의 입장에서 말하기는 민망하다는 듯, 여기를 벗어나 관능의 본고장에서 관능을 배우고 온 윤식의 입을 빌려서. “이 싸구려 술, 자꾸 마시게 된단 말야. 근데 괜찮아.”

기타재제주는 90년 개정된 주세법의 술 분류 조항에서 ‘재제주’라는 항목 자체가 사라지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합성맥주와 합성청주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올림픽을 전후해 100% 원액 양주가 나오면서 ‘합성 양주’인 기타재제주마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뒤였다. ‘기타재제주’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캡틴큐는 주세법상의 명칭을 ‘일반증류주’로 바꾸고 생산량이 줄어든 채 계속 제조되고 있다. 전에는 1년산 럼이 들어갔던 것과 달리 지금은 ‘주정에 럼 향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만든 제품’(롯데칠성음료 홈페이지의 표현)이 됐다.

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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