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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핸드백 지고 슈즈가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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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0년대 크리스찬 디올은 단순히 스커트의 폭을 좀 넓게 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인데, 이는 ‘전후 남성들의 귀향에 따른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여성미를 강조한 놀라운 발명품’으로 평가됐다. 패션사에서 ‘뉴 룩(New Look)’이라는 어엿한 이름조차 갖게 됐다. 때로는 의상뿐 아니라 60년대 모델 트위기나 오드리 헵번이 했던 짧은 헤어스타일도 새롭다는 이유로 발명품의 경지로 평가되기도 했다.


패션사에서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이라면 단연 ‘잇 백’이다. ‘잇(it)’이라는 간단 명료한 대명사 하나로 대표될 만큼 ‘바로 그것’, ‘바로 이 순간의’ 백이 ‘잇 백’이다. 할리우드 스타와 파파라치들의 도움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개가 팔려나가고 여성들의 ‘꿈’이 되기도 했던 것이 바로 이 막강한 ‘잇 백’이다.

그런데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의 매출을 들었다 놨다 할 만큼 효자 상품이었던 잇 백의 권력이 차차 시들해져 가고 있다는 소식이 최근 자주 들린다.

첫 증거는 얼마 전 뉴욕~런던~밀라노~파리를 거쳐 막을 내린 2009년도 봄/여름(S/S) 컬렉션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주요 브랜드 패션쇼 무대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어깨와 손에는 여지없이 백들이 들려 있었다. 마치 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의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달 필자가 직접 현장에서 목격한 밀라노 컬렉션의 패션쇼 장에서 그런 모습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요 디자이너 브랜드 중 구찌 정도만이 백을 중요 아이템으로 컬렉션에 내놨을 뿐이다). 특히 고급 피혁 제품의 본고장으로 이름난 곳이 밀라노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희한한 일이다.

“핸드백에 대한 집착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죠. 대신 이젠 슈즈예요.” 그 누구보다도 백에 집착한 듯 보였고, 전 세계 여성들까지 백에 집착하도록 만들었던 주인공, 바로 프라다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가 이번 패션쇼의 백스테이지에서 한 말이다. 이제 백은 지겹다고, 대신 슈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언에 대한 증거로 백보다는 슈즈에 훨씬 더 공을 들였다. 디자인 자체를 새롭게 하는 대신 그는 영리하게도 아예 슈즈를 신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샌들 안에 우리의 덧버선 같은 형태의 신발을 겹쳐 신는 방법으로 패션의 레이어링(layering-겹쳐입기) 기법을 슈즈의 영역까지 확장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미우치아 프라다의 슈즈에 대한 집착은 이미 올 가을/겨울 시즌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 떨기 꽃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아티스트의 조각품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프라다의 이번 시즌 구두는 여성들의 눈을 유혹하다 못해 갤러리에 전시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올 가을·겨울용 구두. 모델이 신은 것은 신세대 구두 디자이너 니컬러스 커크우드의 작품으로 구조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이어서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마이클 코어스·마르니·지미 추·샤넬·펜디·이브 생 로랑(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엘르(ELLE) 제공]


이미 둘째 증거로 꼽아도 될 만큼 프라다를 비롯해 루이뷔통, 클로에, 이브 생 로랑, 버버리 등 럭셔리 브랜드들의 슈즈 라인은 누가 더 정교하게 누가 더 멋지고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누가 더 고급스럽게 만드느냐에 대한 내기라도 하듯 한바탕 화려한 전쟁이 시작된 듯했다. 특히 디자이너들은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와 버린 앞 코 모양 디자인보다는 뒷굽이나 앞 굽의 모양이나 각도 등에 각양각색 조화를 부려 소비자들 앞에 전혀 새로운 구두들을 선사했다.

셋째 힌트는? 내년 봄과 여름에는 특히 미니스커트가 유행할 예정이어서 화려한 샌들이나 슈즈는 필수 아이템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더하여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일 수 있는 백의 경우, 빅백 같은 눈에 띄는 형태보다는 손에 살짝 쥐어 드는 이브닝용 클러치 백이 낮에 드는 ‘데이 타임 백’으로도 ‘잔잔하게’ 유행할 예정이다. 그래서 어쨌거나 전체 룩에서 힘을 발휘할 것은 이제 우리의 발, 슈즈뿐이라는 결론이다.

마지막 증거는 마놀로 블라닉, 크리스찬 루부탱, 지미 추를 잇는 뉴 슈즈 디자이너들-니컬러스 커크우드, 피에르 하디, 브라이언 앳우, 로플러 랜달 등-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2세대 슈즈 디자이너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들로 새로운 슈즈 발명품들이 많아질 때 갈수록 여성들은 곧 ‘잇 슈즈’에 열광하게 될 것이다.

패션 마케팅의 총아였던 ‘잇 백’이 여성들의 옷장에서 넘쳐나게 되자 이제 대신 패션계는 여성들의 신발장을 노리고 있다.

인기가 있으면 카피 제품도 늘어나는 법, 값싼 카피제품이 난무하는 ‘잇 백’들을 100만원 넘는 돈을 줘가며 사기에는 이제 여성들도 지쳤는지 모른다. 대신 여성들은 로고가 좀 눈에 띄지 않더라도, 레스토랑 테이블 위에서 반짝거리며 시선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명품 백’ 하나보다는 비교적 싸며 카피가 넘쳐나거나 하지도 않는 슈즈 쪽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트렌드 세터’다운 선택이자,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트렌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맘에 드는 구두를 모조리 사들이다가 파산지경에 이른 미국 드라마(그리고 영화) ‘섹스 앤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본받을 일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패션계에서 중요한 코드는 백이 아니라 슈즈라는 점, 그것 하나는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엘르(ELLE) 부편집장/ 강주연

◆촬영협조=신세계인터내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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