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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을찾아서>11.운거산 眞如禪寺上.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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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양은 뿔을 나무에 걸고 잔다(羚羊掛角)

묻는다:영양이 뿔을 나무에

걸 때는 어떠합니까.

답한다:육륙은 36이니라.

묻는다:뿔을 걸고 난 뒤는

어떠합니까.

답한다:육륙은 36이니라.

거도응선사(?∼902)와 한 납자(衲子)의 선문선답이다.운거는 동산·조산선사와 함께 조동종 3대 거목이다.또 운거는 한국선종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선장이다.신라말 고려초 9산선문(九山禪門)중 황해도 수미산파(광조사)를 개산한 진철이엄선사(870∼936)가 진여선사로 그를 찾아가 참문하고 법맥을 이어왔다.

영양은 중국 서북부가 원산지인 산양의 일종이다.잘 때 뿔을 나무에 걸고 자서 자취를 남기지 않는게 생태적 특징이다.‘영양괘각’은 선학의 중요 이론인 몰종적(沒踪跡)·무공덕행을 대표하는 화두다.

우선 질문은 개인을 초월한 곳의 소식이 어떠냐는 매우 철학적인 물음이다.모든 종교행위는 개인적 공리를 떠난 무보상적 시혜,무공덕,무목적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한다.이것이 진정한 보살행이고 헌신이다.그러나 영양을 쫓는 사냥개는 자취를 따라 찾는 분별적 공덕이나 합목적론적 계교(計巧)이상은 나가질 않는다.

따라서 영양이 뿔을 나뭇가지에 거는 것은 개인이 초월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 놓는 것을 상징한다.종교의 무공용(無功用)은 이같이 개인을 초월하는 가운데서 나온다.이 선문답이 의도하는 낙처(落處)도 바로 이같은 무공용·몰종적이다. 답은 초등학생도 아는 구구단의 곱셈이다.

두번째 물음은 종적을 남기지 않은 영양의 몰종적 소식은 어떤 것이냐는 것이다.답은 역시 같다.여기서 육륙은 36의 의미를 잘 봐야한다.우선 6과 6이 곱해져 36이 될 때 두 개의 6은 종적이 없어지고 36이라는 결과만 남는다.

또 6×6=36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는 진리다.즉 이러한 불변의 진리세계에서는 뿔을 걸기 전이나 걸고 난 후라는 ‘분별’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선이 지향하는 절대 진리의 세계란 유(有)를 무(無)라 하고,무를 유라해도 되는 무분별의 세계다.뿔을 걸고 난 후에는 자취가 없지만 걸때의 자취는 있지 않느냐는 의문은 여기에서 해소돼 버린다.

이 화두는 설봉의존선사(822∼908)도 상당법어에서 수시(垂示)한바 있다.

“내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 너희들은 그 말을 쫓아다니며 찾는데,내가 만약 영양이 나무에 뿔을 걸고 숨듯이 자취를 감춘다면 너희들은 어디가서 더듬거리며 찾겠느냐.”

‘영양괘각’은 선사들이 ‘무분별의 분별’이라는 선적 인식과 ‘무작의 작(作)’이라는 선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비유로 널리 활용했다.천하의 조주선사도 이 화두에 한몫했다.

조주:어디서 왔는가.

납자:운거에서 왔습니다.

조주:운거는 어떻게 가르치던가.

납자:어떤 학인이 영양이 뿔을 걸고 잘

때는 어떻습니까고 묻자 육륙은

36이라고 하셨습니다.

조주:운거형이 아직은 괜찮군.

납자:스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조주:구구는 81이다.

조주의 대답 9×9=81이나 운거의 6×6=36이나 다같이 움직일 수 없는 불변의 진리를 뜻한다.무공용행을 하기 위해선 한번 분별의 경계를 여의고 떠나 진여본체를 체험하고 다시 돌아와야한다.이 왕환적(往還的)·원치적(圓置的)·회호적(回互的) 소식을 파악한 후 그것에 표현성을 부여하고자 할때 9×9=81과 같은 곱셈법을 사용한다.

숫자를 사용한 문답을 몇개만 더 보자.

학인:스님의 연세는 얼마십니까.

운문:7×9=68이다.

학인:어째서 칠구 68입니까.

운문:5년은 너에게 덜어주겠다.

운문선사의 첫번째 대답은 나는 나이에 관심없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학승이 7×9=63인데 왜 68이냐고 대들자 내 5년분의 도(道)를 너한테 줄테니 빨리 깨우치라고 질타했다.견성개오(見性開悟)를 독촉한 곱셈법이다.

학인:조사님들 대대로 서로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남전:1,2,3,4,5다.

남전보원선사의 대답도 언설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도단의 본체(도·진리·자성·불성)를 말한 것이다.말로는 표현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이같이 숫자를 사용한다.

남창(강서성 성도)에서 2백35㎞를 달렸다.운거산 진여선사(속칭 운거사) 관문인 그 유명한 조주관(趙州關)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였다.양쪽으로 나지막한 산이 있는 천연의 산협(山峽)이다.‘조주관’이란 석비가 있다.

조주관은 고불 조주종심선사가 조동종 2세인 운거도응화상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운거가 친히 여기까지 나와 전송하며 석별의 정을 나눈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운거와 조주는 호형호제하는 도반이고 당시의 선불교를 주름잡은 선장들이었다.두사람의 우정이 아주 돈독해 조주의 유명한 화두 ‘끽다거(喫茶去:차나 마시게)’의 녹차도 운거사에서 가져다 마셨다.

조주관서 7백m쯤 들어가 절 산문앞에 차를 대고 지객실로 들어갔다.방장 일성(一誠)화상은 마조의 원적 도량인 석문산 보봉선사 방장도 겸임하고 있어 전날 거기서 만났다.

자리를 마주한 지객승의 머리를 보는 순간 한편 놀랍고,한편 야릇한 호기심(?)에 휩싸였다.무려 12구멍의 연비(燃臂) 자국이 이마위 머리에 선명하다.그것도 거의 은행알 크기다.당장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었다.그러나 예를 갖추느라 절얘기를 끝낸 후에나 넌지시 물었다.현재 진여선사에는 이같은 두상(頭上) 연비를 한 젊은 승려가 10여명 있다고 한다. 9∼12개 구멍의 흉터를 남기는 두상연비는 보다 강한 출가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이란다.아마 그 연비에는 선종 본찰의 승려로서 장차 방장이 되고,큰 선장(禪匠)이 되리라는 다부진 서원(誓願)이 담겨 있으리라.

원래 연비란 출가승려가 수계식때 팔뚝에 실초나 향을 꽂고 살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는 의식인데 그 흉터가 남는다.그러나 두상에 그렇게 큰 흉터를 남긴 연비는 처음 봤다.

운거사는 현재 중국 선불교의 본거지였던 강서 지방의 옛 강서불교를 대표하는 총림이다.단적인 증거가 운거사 선원이 현 중국선종의 ‘방장배출 교육’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방장으로 나가려면 운거사 선방의 참선수행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현재의 중국불교 3대 본산은 운거산 진여선사(선종),소주 영암산사(정토종),복건성 광화사(교종)다.운거사는 운거선사가 883년 황제의 칙명으로 주석,조동종풍을 드날리면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절 이름은 당나라땐 용창선원(龍昌禪院)이었고 북송때 진여선사로 개칭됐다.1953년 현대 중국불교 중흥조인 허운대사(1840∼1959)가 사찰을 중창,위앙종 본찰로 만들었다.운거사는 불학원(강원)은 없고 선방만 있다.

상주 승려는 80여명이고 겨울철 70일의 선기(禪期)때는 1백40명까지 방부(房付)를 받는다고.

운거사 선원서 가장 많이 드는 화두는 향엄지한선사가 들었던 위앙종의 전통적 화두인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 生前 本來面目)’과 조주의 ‘만법귀일 일귀하소(萬法歸一 一歸何所)’·‘염불시수(念佛是誰)’라고 한다.(선방 일과는 별항)

한국선방의 참선 수행은 가부좌를 틀고 앉는 좌선 일변도지만 중국선방은 좌선과 동선(動禪)이 절반씩이라는 점이 특이하다.오후 참선이 없는 날은 음력 1,8,15,23일이다.

조전에는 왼쪽부터 운거·백장·달마·도선(道宣)·도용(道容)선사를 불상모양으로 조성해 봉안했다.탑림에 있는 운거묘탑은 당(唐) 천복2년 건립이고 8면 단층 석탑이다.탑 상륜부에 석란(石卵)을 조각한게 특이했다.탑명은 ‘홍각선사탑(弘覺禪師塔)’이다.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정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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