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을 모르는 젊은 시청자들은 "김부선씨 상반신 노출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라며 항의 글을 올리기도 하지만, 제작진으로서는 '육체파 배우'였던 김씨의 과거 이미지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김씨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분식집 주인으로 나와 "딱 맞는 배역"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영화.드라마 등에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작품이 늘면서 '에로 배우'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www.koreafilm.or.kr), 02-521-3147)은 '한국영화 속의 에로티시즘'이란 주제로 오는 18~22일 자체 시사실에서 애정 영화 13편을 모아 상영한다.
추억 속에만 남은 에로 스타들. 왼쪽부터 김부선.오수비.이화란('짚시애마').유혜리('파리애마 2').이보희. 아래는 에로 배우의 대명사인 안소영.
중년층은 에로 영화하면 '애마부인', '애마부인'하면 안소영을 차례로 떠올릴 것이다. '애마부인'은 82년 서울극장 한 곳에서만 6개월간 상영하며 30여만명을 모았다. 지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소영은 160㎝의 키에 갸름한 얼굴로 글래머 타입은 아니었지만 '터질 듯한 가슴'을 강조한 이 영화에서 남성들의 성적 환상을 부추기는 데 성공했다. 긴 머리카락을 출렁거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제목이 환기시키는 이미지도 성감(性感)을 자극했다. '애마부인'이후 그녀는 '산딸기''자유처녀''암사슴' 등 비슷한 에로물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82년 한 해 5000만원 이상을 번 고소득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소위 3S(스포츠.섹스.스크린)정책을 펴 수위 높은 표현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제목 '애마(愛馬)'의 馬가 야하다며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걸려 ''로 바꾸는 해프닝이 있었다. 선정적이기로 치면 '영자의 전성시대'(75년) 같은 70년대 말의 호스티스물이 못지 않았음에도 '애마부인'이 히트한 건 여성이 남성이나 돈에 구애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성을 결정한다는, 변화하기 시작한 세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2대 애마'는 미스코리아 출신의 오수비였다. 오수비는 정인엽 감독이 1편의 여주인공 이름을 따서 붙여준 예명. 그녀 역시 '볼륨있는 가슴'이 강조되었지만 '관능미에 지성까지 갖췄다'는 평을 들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깊은 숲 속 옹달샘' 등에 출연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했다. 염해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김부선은 바로 '3대 애마'였다. '애마부인'은 이후 11편까지 시리즈로 나왔지만 역시 1.2.3편이 전성기였다.
80년대 에로 배우 계보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이보희와 정윤희다.'바보선언''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과부춤''외인구단' 등 이장호 감독의 작품에 단골 출연했던 이보희는 특히 '무릎과 무릎사이''어우동'에서 탁월한 요염미를 과시했다. 가녀린 몸매라 '볼륨'은 그다지 없었지만 토라진 듯한 표정과 새치름하게 쏘아보는 눈길은 '애마' 스타들에게서 볼 수 없던 세련미를 풍겼다. 특히 허벅지를 드러낸 채 다리를 가위 모양으로 꼬고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무릎과 무릎 사이'의 포스터 앞에서 남성들은 숨이 막혔다.
정윤희는 70년대에 유지인.장미희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뤘지만 에로틱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서는 이들보다 앞섰다. 그녀는 '안개마을''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에서 흔히 '백치미'라 부른 육감적인 몸매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이밖에 선우일란.김문희.나영희.이화란.유혜리 등이 계보를 채운다.
이제는 80년대와 같은 뭇 남성이 흠모하는 에로 스타를 찾아볼 수 없다.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매체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에로영화는 에로비디오로 대체돼 '젖소부인''정사수표'시리즈 같은 화제작을 낳았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파괴력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클릭하기만 하면 언제든 '에로 배우'를 만날 수 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에로배우는 정치적 검열과 윤리적 도덕률에 눌려 있던 욕망이 분출하면서 생겨난 사회현상이었다. 성에 허기졌던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성과 섹스가 포만 상태다. 그 결과 성의 소화불량 현상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지 않은가.
이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