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는 지금 거품 속을 걷고 있다. ‘버블’이다. 믿기 어렵게도 벌써 로마 때부터 사람들은 주식과 채권 놀이를 해 왔다. 로마 포럼에서는 신화와 민주적 토론만이 아니라 외환과 환어음이 판을 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라고 불린 소아시아도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물가 앙등과 파산자가 속출했다. 로마 사람 바로는 이를 두고 “Homo bulla est(인생/인간은 거품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버블이란 말은 여기서 말미암고 있다.
실로 투자와 투기는 구분하기 어렵고, 투기와 도박을 분간해 내는 일 또한 부질없다. 분명한 건 도박은 이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성행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돈 앞에 무릎 꿇고 한탄하는 신세와 팔자는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컨대 돈의 눈물은 우리네 문명과 한길을 달려왔다고 해도 그릇된 말이 아니다.
금융자본주의의 시작 알린 튤립
근엄한 중세가 물러날 무렵, 돈을 쥔 유대인과 위그노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저지대(네덜란드)에 몰려들었을 때 튤립은 검은 꽃을 잉태하고 있었다. 꽃이 검은 튤립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진한 갈색일 뿐이다. 터키에서 건너온 이 식물 뿌리에 사람들은 돈의 상상을 불어넣었다. 바로 탐욕과 허영이다. 땀 흘려 일하고, 목숨 걸고 배를 타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꽃에 미래를 걸었다.
꽃 한 뿌리값이 10년치 생활비와 맞먹을 정도로 치솟았다. 개미투자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루아침에 꽃값이 추락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1637년 2월 초, 튤립 거래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튤립에서 아름다움과 향기가 사라진 건 결코 아니었다. 꽃이 품고 있는 내재가치보다 몇 만 배 부풀어 있던 거품이 문득 꺼져버린 것이다. 근대사회 초입에서 돈꽃은 황홀하게 피어올랐다가 눈물로 떨어져 내렸다. 금융자본주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거래소 앞, 은행 뒷골목, 술집, 안방, 거리에서 전문가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묻거나 미친 듯이 자문했다. 하지만 합리적 버블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으므로 현명한 답 또한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버블 분위기에 큰 집과 미술품을 경매로 넘기고 망한 바로크 시대의 대화가 렘브란트도 끼여 있었다. 돈의 눈물이 캔버스에 안료 빛깔을 덧칠했음 직하다. 렘브란트의 이름난 자화상 연작이 품고 있는 깊이가 금융자본의 비인간성과 일치하는 셈이다.
거품 경제에서 새 인생 시작한 거장들
발작적 버블은 전염병처럼 잉글랜드로 건너가 1690년대 런던 금융가 익스체인지 앨리에서 주식회사 설립 붐을 타고 한몫 쥐어 보려던 대니얼 디포를 날려버렸다. 그는 스페인에서 장사를 하거나 사향고양이로 향수를 만들어 보려다 당시로서는 사기에 가까운 잠수기 회사에서 일을 했다. 잠수기나 향수가 상상적 요소가 강하기는 하다.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은 늙마의 그를 구렁텅이에서 구해 주었다. 1719년 예순 가까운 나이에 쓴 처녀작 『로빈슨 크루소』로 그는 소설가로 거듭나게 됐다.
케임브리지대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조폐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천재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역사상 3대 버블 중 하나인 남해(South Sea) 회사에 투자했다가 돈을 몽땅 날렸다. 여든다섯의 그는 “천체의 무게를 잴 수는 있어도 미친 사람들 마음은 알 수 없다”는 투의 말을 남겼다.
『걸리버 여행기』의 아일랜드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실에 사는 그에게는 ‘걸리버’가 없었음이 틀림없다. 이렇듯 투기는 미래가치를 앞당겨 보상받으려는 인간 군상에게 만유인력처럼 눈물을 뿌리게 했다. 확실히 눈물은 낮은 데로 떨어진다. ‘나보다 더 바보’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내 지갑으로 옮기고자 소문을 따라다니며 재산을 털어 넣은 사람들은 공원 노숙자가 되거나 식민지 땅으로 도망가야 했다.
커피숍은 고상한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문화적 공간이 아니라 이들이 증권 투자와 시세 분석·거래를 하느라 죽치던 투전판에서 본격화했다. 로이드 보험사도, 증시 안내지도 이 다방에서 출현했다. 정작 런던 일반 가정에서는 티를 마시지만 강한 집중과 각성이 필요한 자본판에서는 커피가 주효했다. 도박판과 초상집에서처럼 그건 약이었다.
남해버블 속에 큰 몫을 챙긴 이도 있었으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9대조 할머니 말보로 백작부인이 대표 격이다. 훗날 미국 증시 작전꾼 레너드 제롬의 딸이 영국으로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 윈스턴이다. 1929년 월스트리트에 2만 달러를 투자했던 처칠은 현장에서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을 지켜본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돈은 당연히 날아갔다.
헛소문과 가짜 기사가 일으킨 투기 광풍
돈 앞에 일어나는 광기에는 늘 허풍, 거짓, 그리고 이들을 ‘객관적’으로 도와주는 미디어가 함께했다. 이집트인들이 버린 황금과 보석을 건져 올리기 위해 홍해를 퍼내겠다는 따위의 사기가 판쳐 댔으니 환상 판매라 해도 좋을 남미 광산 붐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진흙에서 금을 씻어내기만 하면 된다’.
이 풍문에 몸을 던진 이가 이름 앞과 끝 자를 떼면 유대인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디즈레일리(Disraeli)다. 그는 영국 총리가 되기 전에 25년 동안 광기 속에 떠돈 삶을 바탕으로 소설 『비비언 그레이』를 썼다. 정신 요양을 받을 정도로 충격이 컸지만 그는 끝내 일어섰다. 1845년 영국에는 자그마치 1200개 철도 노선 계획이 잡혀 있었다.
투기 붐에 난립한 거의 가짜에 가까운 회사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내놓은 구상들이었다. 철도와 더불어 확장된 신문은 철도를 위해 과장을 넘어 허위 기사를 주저 없이 갈겨썼다. 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다. 붐 조성 신문 기사는 상당히 묵은 전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가 채무자 감옥에 갇혀 있던 소년 시절을 보낸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이 시기를 온몸으로 관통하면서 투기사회 이면을 여러 소설에서 날카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백만장자라는 말은 프랑스를 강타하고 간 미시시피 버블에서 단기 시세차익으로 떼돈을 번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태어났다. 남해버블이나 미시시피 버블(1720년)이나 정부 국채 탕감에서 출발한 식민지 투기 열풍의 산물이었다. 시민계층에 의식 변화가 일어나면서 더는 함부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없었던 데서 나온 발상이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금으로 교환할 수 없는 불환지폐가 처음으로 무제한 발행되었고, 거품은 간단한 소문 하나에 걷잡을 수 없이 꺼져 내렸다. 함부르크 보험회사와 빈 동방무역회사와 제네바 부동산이 한꺼번에 추락한 최초 국제 버블이었다. 이 불황의 다리를 건너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는 철모르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로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왔다. 루소의 시대이자, 괴테의 질풍노도 시대였다. 혁명은 코끝에 와 있었다.
가혹한 공황의 시련이 맺은 열매
1930년대 대공황 말고도 미국에는 여러 차례 공황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이 『톰소여의 모험』을 쓸 수 있었던 건 훗날 그와 찰스 워너가 이름 붙인 금권정치 시대에 투기광으로 보낸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재임 기간 내내 협잡꾼에 둘러싸여 있던 남북전쟁 영웅 그랜트 대통령은 퇴임 뒤 그랜트 & 워드 증권사를 설립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피라미드형 고율 배당을 약속한 주식 사기 사건이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도 남은 마크 트웨인의 권유로 『미합중국 그랜트의 회고록』을 써 죽기 전에야 그는 가까스로 빚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기 인상주의의 거장 폴 고갱은 화가가 되기 전 파리 증권가의 브로커였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뚜쟁이 오스왈드 포크를 통해 환투기에서 상품과 주식 투자로 제법 큰돈을 수중에 넣었지만 대공황 때 자산 7할과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 돈을 날려버렸다. 아직 그 유명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쓰기 전이었다.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케네디가의 아버지 조셉과 대배우 겸 감독 찰리 채플린은 대공황 직전 주식을 팔아 큰돈을 챙겼다. 나머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쌈짓돈을 투기의 허공에 흩뿌리고 말았다.
투기자본은 튤립·식민지·운하·철도·자동차·라디오·비행기, 하물며 성냥과 컴퓨터로 끝없이 이어지면서 몸부림을 쳐 왔다. 땅과 건물 따위 부동산은 이들과 어깨를 걸고 달려왔다.
역사상 어느 시기든 돈의 눈물은 가혹했다. 거품에서 빠져나오면서 어떤 이는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빛을 보았고, 소설을 쓰고, 과학으로 발전시켜 냈다. 케인스처럼 투자법을 개발해 돈을 회복한 경우도 있었다.
맥주는 거품이 사라진 뒤라야 양을 알 수 있다. 그걸 나눠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