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산마을>27.경북문경 관음리

중앙일보

입력 1996.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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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도예가 김성기(金聲奇.67)씨는 요즘들어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관음리(觀音里.문경시문경읍)에서 매운 연기를 맡으며 도자기를 굽던 선후배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떴거나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사기점놈」이란 심한 욕을 들으면서도 도자기를 성심성의껏 굽던 옛 도공의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이 젠 남지않았다는 허전함도 크다.그러다보니 관음리를 둘러싸고 있는 백두대간의 준령 황정산(1천70).대미산(1천1백15).주흘산(1천1백6)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보이기만 한다.아직도 관음리엔 자신의 가마터인 뇌암요(腦岩窯)를 포 함해 도자기 굽는 곳이 세군데 있지만 두곳은 최근에 문을 연 곳이다.
문경읍에서 20리정도 떨어진 월악산 골짜기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는 관음리는 꼭두머리라 불렸다.마을 뒷산의 바위가 마치 꼭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金씨의 가마터 이름이 뇌암요인 것도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문경은 예부터 서민들의 생활도자기인 민요(民窯)가 유명했다.
1700년께 관요(官窯)가 쇠퇴하면서 도공들이 문경의 두메산골에 숨어들어 가마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도자기는 절간처럼 산좋고 물맑은 곳이라야 제대로 모양이 난다는 도공들의 소신 때문이었다.
문경도자기는 권문세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서민의 한숨과 배고픔이 배어나던 누르께한 생활도기였다.소박하면서도 투박한 문경도자기는 정감이 간다.전시용이 아니라 서민들이 평상시 사용했던 막사발.대접등 사기그릇들이기 때문이다.
한창때 문경에는 관음리 17군데를 포함해 86개의 가마터가 있었다.그 가운데 문경 도자기의 명맥을 마지막까지 지킨 곳이 바로 관음리다.일제시대 문경의 모든 지역에서 가마터가 사라질 때도 관음리에는 두개의 가마터가 남아 많은 도공을 배출했다.金씨를 비롯해 양근택.천한봉.김정옥씨등 유명한 도공들이 모두 관음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경도자기가 예술적 평가를 받은 것은 60년대부터다.
그러나 우리가 「개밥그릇」이라 해 바라보지도 않던 그 사기그릇에서 익살과 발랄한 생명력을 발견한 사람은 부끄럽게도 일본인들이었다.1960년대 후반 일본 관광객이 문경에 와 자신들이 최고급품으로 취급하는 「이조다완(李朝茶碗)」의 후 예들을 발견한 것이다.이조다완이란 임진왜란때 일본이 빼앗아간 우리 서민들의 막사발로 일본에서는 귀족계급의 최고급 찻잔으로 쓰였다.
관음리가 가마터의 적지(適地)가 된 것은 연료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백두대간의 높은 산을 중심으로 나무(땔감)와 흙,그리고 물이 풍부했다.金씨는 세살때 양친을 여읜 뒤 형님마저 살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버리자 9살부터 관음리에서 흙일을 배웠다.이후 金씨는 60년 가까운 생활동안 한번도 가마곁을 떠나지 않고 발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빚었다.오랜세월 흙을 만지면서 손가락 지문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닳았고팔은 굽었다.
이제 관음리에 과거처럼 많은 가마터가 생겨날 것같지는 않다.
그러나 도자기를 정성껏 빚던 장인정신만은 관음리에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었다.
글=하지윤.사진=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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