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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비디오 아트’ 개척한 국내파 박현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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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호 05면

백남준이 유럽과 미국을 떠돈 해외파 비디오 아티스트였다면 박현기(1942~2000)는 국내파였다. 그는 홍익대 회화과와 건축과에서 공부한 건축가였는데 1974년 대구 미문화원에서 백남준의 작품 ‘글로벌 그루브’를 보고 비디오 아트에 사로잡혀 한국 비디오 아트의 개척자로 나서게 된다.

때마침 대구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10월 19일까지 열리고 있는 ‘박현기 유작전-현현(顯現)’은 국내 비디오 작가 1세대로 활동한 고인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74년부터 79년까지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며 열린 ‘대구현대미술제’의 중심 인물인 그를 작품으로 만날 수 있어 반갑다.

70년대 대구는 한국 현대미술의 1번지라 자부할 만큼 반형식주의적인 다양한 미술 양식이 꽃피었던 국제 무대였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 ‘큐빅 디자인’을 운영하며 비디오 작업에 몰두했던 박현기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도가적 예술관을 보여 주었다. 그는 “예술이란 깨닫는 수단이듯이 비주얼은 깨닫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작가노트를 남겼다.

박현기는 비디오 아트에서 매체를 조작해 시간을 ‘조절’하고 시간과 ‘놀’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비디오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동양의 정신을 표현하려 애썼다. “완전한 대상이 그물에 걸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추상의 결집이지 대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라는 작업일지의 한 구절은 기술적 완성도와 별개로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에 몰두한 작가혼을 드러낸다. “나타남은 보여짐을 일컫는 체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tv stone

박현기는 미디어를 아시아적 관점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집스럽게 한국적 비디오 아트의 독자적 길을 걸어간 이 외골수 비디오 아티스트를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먼저 알아주었다는 점이 그 한 증거다. 백남준이 외국에서 뿌린 씨앗이 동시대 고국에서 소담하게 열매 맺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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