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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서양 패션 진화시킨 ‘아시아 영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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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오바마가 미국의 흑인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 그렇게 역사적인 순간은 아니다. 오히려 오바마의 부인 미셸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아시아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나온 것이야말로 경천동지(groundbreaking)할 일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지난달 9일자 ‘아시아 유행을 타라’는 기사에서 “미셸이 태국 디자이너 타쿤 파니츠굴의 옷을 입었다”며 이렇게 썼습니다.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관심이 점점 더 높아져 갑니다. 그것이 아시아의 문화적 요소에 대한 것이든, 인정받는 아시아인이 늘어난 결과이든 간에 아시아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시아 물결, 스타일에선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알아봅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 또한 커지고 있다. 주경기장인 냐오차오를 보면서 ‘고고한 학의 둥지’를 떠올리듯 동양적인 문양과 색감, 그리고 전통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패션에서는 ‘문화의 정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2008 봄·여름 컬렉션에서 프라다는 중국의 전통 의상 ‘치파오’에서 영감을 얻어 둥그런 스탠드 칼라를 디자인하였고 발렌시아가·디오르·알렉산드로 델 라쿠아 등도 각각 중국의 전통 문양을 재해석한 프린트, 일본 전통 의상 기모노의 소매와 깃을 응용한 원피스 등을 선보이며 동양 문화에 대한 경외심을 패션으로 표현하였다.

사실 동양이 서양의 패션에 영감을 준 것은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되어 왔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문명의 교류에서는 단순히 실크라는 직물의 이동을 넘어 그 안에 담겨있는 장식미술과 공예, 그리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영감을 제공해 준 것이었다. 도자기를 ‘본 차이나’로 부르고, 서양의 차(茶)문화 또한 교류의 영향이니 동양 문화가 서양인의 생활 양식마저도 바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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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대두

1925년 파리에서 국제장식미술전(Exposition International des Arts Decoratifs)이 열린 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동양적인 신비로운 색과 기하학적 무늬를 넣은 패션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르데코 스타일의 패션은 코르셋을 위주로 허리를 졸라 매었던 서양의 드레스 스타일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슬림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발표하였다. 동양의 포(布)형태로 신체의 움직임과의 조화를 이루며 아르데코 고유의 일러스트레이션에 미적으로 표현되었다.

직물은 동양의 문자와 같은 기하학적 문양이나 꽃이나 새 같은 자연 문양이 직조되거나 수놓아져 화려함을 더했으며 장신구는 길게 늘어뜨린 진주목걸이나 산호와 비치로 장식된 머리핀을 선호했다. 집안의 장식은 옻칠을 한 동양풍의 가구와 병풍으로 채워졌다. 동양에서 들여온 애완용 새나 강아지를 갖추지 않으면 귀부인의 품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1980~90년대에는 이브 생 로랑·발렌티노 같은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이 이브닝드레스에 중국풍의 화려한 직물과 모피 장식을 활용하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말 국가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글로벌 시대로 접어들면서 현대 패션에서 그 영감의 원천과 국적 또한 더욱 광범위하고 다양해졌다. 중국 소수민족의 장신구에서, 인도의 전통 의상에서, 중앙아시아의 전통 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동·서양이 만나는 새로운 퓨전룩(fusion look)을 선보이기도 했다.

# 공예의 재발견

족자의 형태미를 심플한 원피스 드레스로 표현한 간호섭 교수의 '족자의'.

도자기·족자·금속 장신구 등 동양의 공예품들이 재발견되어 새로운 패션으로 표현되고 있다. 로베르토 카발리는 용과 구름이 어우러진 도자기의 문양과 청·백의 색감을 이브닝드레스에 그대로 프린트하여 실크의 흐르는 듯 부드러운 실루엣에 도자기의 유려한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필자 또한 올림픽 개막식에서 보여졌던 족자의 형태미를 심플한 원피스 드레스로 표현하여 순수한 동양의 선(禪)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리고 수묵화를 프린트하고 꽃봉오리의 부분에 우리의 전통 머리 장식인 떨잠으로 장식하여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패션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목이 길면 길수록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정받는 소수민족의 목걸이에서 영감을 받아 파리의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위한 장신구를 디자인했다.

이제까지 중국과 일본으로 대변되던 동양풍의 패션에서 눈을 돌려 듣도 보도 못한 소수민족의 장신구와 넓은 폭의 칼라를 가진 허리를 잘록하게 조인 서양풍의 재킷을 매치, 동·서양의 혼합된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다.

# 전통 복식의 부활

오랜 세월을 거쳐 정착된 전통 복식은 기후·풍토와 같은 자연환경의 영향과 함께 종교, 예술·정치·경제 같은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아 고유의 문화와 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전통 복식은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벽을 넘어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주름의 우아함과 통풍과 습기를 고려, 한쪽 어깨를 드러낸 비대칭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인도의 ‘사리’가 머리의 터번 장식과 함께 에르메스의 컬렉션에서 부활했다. 알렉산드로 델 라쿠아는 서양 드레스의 귀엽고 우아한 퍼프 슬리브에 중국 치파오의 옆트임을 믹스 매치하는가 하면, 일본 기모노의 커다란 허리띠인 오비를 스커트에 응용, 서양과 동양이 조화를 이루는 룩을 연출했다. 한편 발렌시아가는 직접적으로 전통 복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서 탈피해 진시황릉을 지키는 병사들의 갑옷을 형상화, 현대 여성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위에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프린트로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외에도 안토니오 베나르디·드리스 반 노튼 등의 디자이너들은 서양 디자이너의 눈으로 해석한 동양적인 전통 패션을 계속 선보여 이제는 그들 자신의 디자인 정체성으로까지 자리 잡고 있다.

# 아시아여 영원하라

이전에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패션계에서는 아시아의 영감(Inspiration)이 끊임없이 화두로 오르내릴 것이다. 단순히 패션을 넘어 이제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음식·주거, 정신적 철학 세계에 이르기까지 더 큰 파장을 일으키리라 생각된다. 실제로 웰빙 열풍으로 동양의 식단이 서양인 식탁에 오른 지는 한참 되었으며,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는 요가·명상 등이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기업 경영에서도 중용과 덕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권으로 더욱 압축되는 지금 이런 만남과 충돌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자연스럽고 당영한 흐름 속에서 그 영감의 원천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며. 아시아여 영원하라!

간호섭 패션 디자이너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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