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점에서 우리은행 신탁부 이재우(李在祐.53)부장은 복된 사람이다. 나이는 아직 그렇지만 1m70㎝가 채 안되는 체수에 매일 적어도 5~10㎞는 달린다. 이미 몸 깊숙이 각인돼 하루라도 거를라치면 찌뿌듯해 견디지 못한다. 시작한 지 4년밖에 안 되지만 그동안 달린 거리만도 2500㎞가 넘는다. 올 들어 벌써 500㎞를 넘겼다.
28일 오전 5시 조금 넘은 시각 서울 공릉동 화랑대역 앞. 이부장이 운동화 끈을 조인다. 몸을 비틀고, 손발을 털고 뻗고 하는 듯싶더니 이내 태릉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번해 오는 하늘 아래 깨어나는 아침이 얼굴에 끼친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저만치 희미하던 가로수며 집, 풍경들이 또렷한 모습으로 조례를 위해 달려든다. 장딴지에 힘을 줄수록 빨리 몰려왔다 몰려가고, 늦추면 늦출수록 그네들도 소걸음을 한다. 자유자재. 매일같이 달리는 길인데 오늘 따라 기분이 수승(殊勝)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촉촉하던 땀이 어느새 방울 지어 온몸 위를 굴러내린다. 반환점인 담터고개를 돌아 되짚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왕복 6㎞ 남짓한 거리지만 오갈 때마다 새롭다.
"왜 인생을 영원한 달리기라고들 하잖아요. 비유를 떠나서 실제 달려보니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요. 힘들다고 함부로 포기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무리해서도 안 되고, 또 힘들지만 희열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리고, 달릴 수 있어서 달리고, 달리다 보니 더욱 건강해져 또 달리고…, 그런 거죠 뭐."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대구 성당동지점으로 있던 2000년 6월 20일. 보통 샐러리맨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 역시 먹고살기에 찌들리다 보니 언젠가부터 당뇨와 고혈압으로 시달리던 터에 달리기를 하면 지병을 고칠 수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나서였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그는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하면 우승을 도맡던 추억을 떠올리고 용기를 냈다.
우선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두류산 공원을 한 바퀴(2.8㎞) 도는 것으로 시작했다. 16분이 걸렸다. 약간 숨이 찼지만 그런 대로 견딜 만했다. '촌놈' 바탕이 아직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 뛰었다. 한달가량 지나자 3㎞쯤까지 힘이 들다가 4㎞ 쯤 되면 엑스터시가 느껴졌다. 조금씩 거리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그해 10월21일 춘천 마라톤에 도전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42.195㎞, 3시간57분35초. 숫자놀음으로 밥 먹는 사람이지만 입때껏 살아오면서 숫자가 의미있게 느껴진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달리기를 하면서 혈압과 혈당치도 점점 좋아지고 있던 참에 정말 자신감이 확 생깁디다."
달리기를 계속해 그해 말 총연장 349.795㎞를 기록하면서 그는 '우리은행 마라톤클럽'을 만들었다. 처음 10여명으로 출발한 게 지금은 217명으로 늘었고 풀코스를 뛰는 회원만 100명이 넘는다. 이어 내친김에 달리기와 관련된 기사와 서적을 뒤적이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 이듬해 1월 '마라톤(장거리) 잘 하는 일곱가지 요령'을 만들었다. 동료들을 끌어들이고 교육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신도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10차례 국제대회에서 풀코스를 뛰어 효용성을 입증했다. 기록도 3시간30분대로 단축시켰다.
특히 지난해 4월엔 제107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도 참가해 완주했고, 5개월 뒤 열린 '제4회 서울울트라(100㎞)마라톤대회'에선 10시간6분43초의 기록으로 참가자 850명 가운데 88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마라톤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과학이에요. 사람에 따라 신체와 여건에 맞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꼼꼼한 계획과 더불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정직과 부지런함, 성실성이 없으면 안됩니다. 한마디로 노력한 것만큼 결과가 나오는 운동입니다."
실제 그는 연습일지를 기록한다. 달리기를 할 때마다 메모해 둔 것이 두툼한 책 한권 분량이다. 일자.거리.기록.코스.날씨.훈련파트너.특기사항 등을 빠짐없이 적어놓았다. 마치 살림 잘 하는 아낙의 가계부 같다. 주.월.연 단위로 결산하는 것도 그렇다.
"마라톤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과거와 연결되는 거예요. 어제의 축적이 오늘을 있게 하고, 오늘의 축적이 내일을 보는 거울이거든요. 이 점이 달리기와 인생이 닮은 점입니다."
그는 달리기를 하면서 많은 점을 느끼고 배운다고 말한다. 그래서 달리기를 꾸준히 하다 보면 사람 자체가 변한다고 강조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과 목표의식이 강해 회사 업무나 사회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리 회원들 가운데 일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맡은 일은 꼭 해내고 마니까요."
그가 달리기를 할 때 연습이든 실전이든 반드시 직장이름을 달고 달린다. 회원들도 마찬가지. 운동에 대한 자신감이 직장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지도록 최면(?)을 걸기 위한 것이다. 2002년 9월 부산 아시안 게임과 지난해 대구 유니버시아드 성화봉송(서울)을 할 때도 그랬고, 서울울트라마라톤에서도 그랬다. 그 덕분에 지난해 1월 우리은행이 주는 '자랑스러운 우리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지병으로 복용하던 약을 끊었다. 지난해 10월 건강진단에선 심폐기능이 20대 후반이란 판정도 받았다. 하지만 달리기 덕분에 얻은 병(?)도 있다. 욕심이다. 그는 오는 가을 서울 울트라마라톤에 다시 도전해 9시간30분대에 주파한 뒤 내년께 장장 243㎞거리의 사하라마라톤에 도전할 계획이다.
"저는 아흔살까지 뛸 겁니다.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를 하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자신합니다. 달려보세요. 모든 게 달라져 보이고, 정말 달라집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시작하세요."
건강 때문에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도사'가 된 듯한 그의 전도는 마지막까지 치열하기만 하다. 이게 바로 달리기 효과인가?
글=이만훈 사회전문기자<mhl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