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초 가는 날은 화창했다. 아내는 아이스박스에 각종 음료수와 얼음물, 과일에다 캔맥주까지 정성스레 준비해 햇볕 정책에 화답을 했다. 일 년 열두 달 추석과 설 빼놓고는 단 하루도 식당 주방을 떠나지 않는 ‘철의 여인’ 누나가 연가를 내고, 공장에서 일하는 동생까지, 우리 삼남매는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들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지금 환갑을 바라보는 누나도 초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도시로 팔려 나와 그야말로 세상 밑바닥을 온몸으로 밀며 살아와 한 성깔 하시는 분이다. 노무자에서 십장, 마지막에는 폐선 해체하는 작업장에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큰형, 84년에 반쯤은 거지가 돼 용산역 근처에서 사라진 작은형, 평생을 술주정으로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 식도 협착으로 물 한 모금 못 넘기고 숨을 거둔 어머니, 겨우겨우 시골에서 고등학교 나와 자동차 부품 하청공장에서 일하는 동생까지, 우리는 만나면 날씨 얘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텔레비전 보는 척이나 했다. 어서 빨리 명절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누군가 눈치 없이 옛날 일을 떠올리거나, 어렸을 때 굶고 고생한 얘기를 했다가는 바로 화산이 폭발한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팽팽하게 물 넣은 풍선이거나 불 옆에 놓은 폭탄이어서 살얼음 위를 건너가는 마음으로 만나야지, 잠깐만 방심하면 바로 뇌관이 터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기 마련이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큰형과 누나가 할배, 할매가 되고 동생이 불혹을 넘기고 나도 허옇게 서리 내린 중년이 되었다. 무덤은 온갖 잡풀과 칡넝쿨로 우거졌으나 그 많던 가난과 술주정도 세월 앞에서는 속절없이 낮아져 평평해지고 있었다. 더 평평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안다랭이에서 바라본 장산은 그 이름만큼이나 우람했고 뒷산 수룡골에서는 늦매미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누나는 장산 너머까지 땔나무를 하러 다녔다는 얘기, 고동을 줍고 쑥을 캐고 댕댕이 소쿠리를 엮었던 추억담을 털어놓으며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잔잔한 바람이 되었다.
나는 수리조합 막는 공사에 작은형과 잔돌을 날라 번 돈으로 금성 라디오를 샀을 때 흥분했던 일과 모깃불을 피워 놓고 먹은 수제비와 눈 내리는 겨울날 토끼 사냥과 지금은 없어진 주막으로 아버지 외상술 심부름 다니던 이야기를 하면서 두둥실 구름이 되었다. 누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큰돈을 벌어 와 식당을 차렸고 누구는 월남에 가서 병을 얻어 와 고랑고랑 살다 저 세상으로 갔고 누구는 술집으로, 누구는 덤프트럭 기사로, 누구는 버스 안내양으로, 풍년빵집으로 시집간 서운이 누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동생은 멀리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냇물이 되었다.
그래, 우리도 언젠가는 저 바람이 되어, 저 구름이 되어, 저 강물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리라. 저 나무가 되어, 저 칡넝쿨이 되어, 저 벌레가 되어 한 줌 흙 속으로 스며들리라.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흔적도 찾기 어려운 아버지, 어머니의 품속으로 기어이! 반드시! 돌아오고야 말리라. 북치재 너머로 빗금 그으며 떨어지는 별똥별 되어 무한 천공,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지리라.
돌아오는 길에 폐허가 된 집터를 둘러보고, 집터 아래에 살고 있는 먼 친척집에 들렀다. 칠순이 넘은 친척 형님과 형수는 어머니처럼 맨발로 뛰어나왔다. 자갈밭을 일구어 돌이 싸질러 놓은 오줌으로 농사를 지었다는 두 분은, 오이짠지와 노각과 감자와 고추를 바리바리 싸 주신다. 저렇게 생생한 어머니와 하느님과 부처님은 도처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울자, 웃고 살아도 짧은 게 인생이다. 고향이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어서 고향이다. 언제나 맨발로 뛰어나오는 어머니가 있어 고향이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고 어머니가 안 계셔도 고향은 우리들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 그 고맙고 도타운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오늘 맞이하는 한가위, 저 봉긋 솟아오른 달만큼이나 우리는, 희망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좋겠다. 밤 새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새벽별 되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