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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맞는 단 하나의 와인 찾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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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11면

고향 아저씨 같은 인상의 샤토 라퐁로셰 주인 테스롱이 기자 일행을 맞으러 달려오고 있다. 선명한 황토색 샤토 벽에 아침 햇살이 내리고 있다.

부지깽이가 곤두선다 했던가. 하도 바빠 부지깽이도 누워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추수철 속담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부지깽이들이 요즘 그럴 때다. 포도 수확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포도를 따면 바로 와인을 담근다. 두 작업을 함께 하니 눈코 뜰 새가 없다. 더구나 와인의 일생에서 어느 단계보다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바쁘면서 신경이 곤두서는 날들이 이어진다. 올해 포도 수확은 8월 중순에 시작됐다. 작업은 10월까지 계속된다.

올해 프랑스 포도 작황은 좋지 않다고 한다. 2000년 이후 최악의 와인 흉년을 예상한다. 지난겨울이 너무 따뜻했던 게 첫째 원인이다. 이상난동에 놀란 포도나무들은 봄이 왔나 싶어 겨울 휴식을 망쳤다. 봄은 너무 추웠다. 포도 꽃이 피는 4월에 영하의 날씨가 잦았다. 서리와 우박이 오락가락했다. 열매가 여무는 여름엔 고온 건조해야 좋은데 비가 자주 와 병충해에 시달렸다.

‘분홍의 성’이라는 애칭을 가진 샤토 루덴의 본관

보르도의 테루아르(terroir)가 최고의 와인용 포도를 키워 준다고 믿는 보르도 농부들은 하늘이 참 야속했을 것이다. 테루아르는 포도밭 토양, 좌향, 온·습도, 햇빛, 바람 등 포도가 자라는 데 작용하는 총체적 자연환경을 일컫는 용어다. 여기에 담긴 그들의 자부심까지 읽자면 하늘의 은총 또는 천혜의 환경이라는 뜻이다. 그 테루아르가 도와준 게 없으니 낙담이 얼마나 크겠는가.

테루아르 다음으로 내세우는 보르도 와인의 자부심은 다양한 포도 품종과 거기서 나온 와인을 배합해 새로운 맛을 빚어 내는 블렌딩이다. 포도원마다 3~5가지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고 따로 와인을 담가 발효·숙성시킨 다음 일정한 비율로 섞어 다시 숙성 과정을 거치는 일이다. 몇 가지 싱글 와인을 어떤 비율로 배합하는지는 샤토마다 다르다.

1 샤토 랭슈 바즈의 옛 포도 선별·압착·양조 작업장은 지금은 자료실 겸 갤러리다. 2 샤토 마고는 자체 공방을 두고 와인 숙성용 오크통을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쓴다.

포도 품종이 다양하니 수확은 8월 중순부터 석 달쯤 계속된다. 레드와인 포도를 보면 보르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은 메를로다. 전체 면적의 62%나 된다. 조생종이어서 8월 중순부터 수확한다. 반대로 ‘메도크의 황제’라 칭송되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만생종이다. 메도크 지역 와인 맛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 품종은 10월까지 수확한다. 재배 면적은 25%. 이 밖에 카베르네 프랑이 12%, 프티 베르도 등 기타 품종이 1% 재배된다.

보르도 샤토의 주인들이 테루아르·품종·블렌딩을 강조하는 배경엔 신대륙 와인에 대한 경계심이 드리워져 있다. 프랑스 와인은 눈가림(블라인딩) 테스트에서 미국에 참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도 프랑스인은 자기네 와인에는 신대륙 와인이 따라올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자부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우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신대륙 와인과의 다른 점을 찾아내고, 유리한 내용을 강조한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보르도를 ‘와인의 수도’ 또는 ‘와인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포도 재배 환경이 가장 좋은 곳은 보르도라고 그들은 믿는다. 그래서 테루아르를 강조한다. 신대륙 와인은 따라올 수 없는 천혜의 조건이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품종과 블렌딩을 내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대륙 와인은 대부분 한 품종의 포도로 만든 싱글 와인이다. 품종이 와인 이름을 대신할 정도다. 보르도에서는 샤토에 따라 와인 이름이 정해진다. 샤토마다 다른 테루아르와 블렌딩의 개성을 이름에 담자면 내용물의 성격보다 제조자를 앞세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신대륙 와인보다 우월하다는 보르도 와인의 풍미는 무엇일까. 와인이 만들어지는 현장에 답이 있다. 보르도 시내를 출발해 대서양까지 지롱드 강변을 따라 가는 100㎞가량의 D2도로는 가히 ‘와인의 성지’라 할 만하다. 세계적 명문 샤토들이 어깨를 맞대고 이어져 있다. 그곳에 가장 권위 있는 답이 있지 않을까.

우선 와인의 기초부터 배우자. 보르도 시내 중앙광장에 있는 와인협회 2층 와인학교 강좌가 믿을 만하다. 다음엔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신개념 샤토 ‘라 와이너리’에 가서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아보자. 그리고 와인협회 건물 맞은편에 있는 보르도관광청를 통하거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뒤져 투어 상품을 알아보고 예약해 샤토를 방문하자. 포도 수확에 참여하고 인부들과 식사한 다음 와인 담그는 과정을 참관할 수 있다. 별도로 와인 시음이나 블렌딩 체험도 가능하다.


와인 기초 배우기
보르도와인협회(CIVB)가 운영하는 와인학교는 기초부터 전문가 과정까지 서너 종류의 강좌를 열고 있다. 강의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진행한다. 정규 강의는 1~3일 과정이지만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여행자를 위한 2시간 입문과정 특강도 있다. 이론·시음을 60분씩 한다. 강사는 대개 양조학자다.

보르도 와인산업, 테루아르의 내용과 의미, 토양, 포도 품종과 와인 종류, 블렌딩 과정, 와인의 유통구조 등에 대해 배운다. 시음은 레드·화이트 두 종류씩 네 가지 와인을 맛본다. 와인의 색·향·맛을 느끼고 표현하는 용어를 배운다. 잔마다 다른 와인의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잔을 흔들어 다시 향을 맡고, 입 안에 머금어 굴리면서 맛을 느끼는 과정을 반복한다. 시음 때 입에 머금은 와인을 마시는 건 자유지만 대개 뱉는다. 취하면 와인의 생명인 색·향·맛의 미묘한 변화에 둔감해지기 때문이다. 수업료는 25유로.

내게 맞는 와인 찾기
보르도와인협회(CIVB)가 운영하는 와인학교에서 기초를 다졌으면 ‘내 몸에 맞는 와인’을 찾아보자. 신개념 샤토 ‘라 와이너리’에서 매일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곳은 미국 나파밸리의 마케팅 기법을 도입해 필립 라욱스가 2007년 개장한 와인문화 복합단지다. 전통적 샤토에 레스토랑·갤러리·공연장과 와인 몰을 갖췄다. 보르도에서는 아주 새롭고 색다른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와인 궁합 찾기 프로그램은 개성이 강한 와인 여섯 종류를 시음하고 각각에 대해 5단계로 된 선호도를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LCD 화면을 보고 리모컨으로 응답한다. 중간중간 와인 상식을 묻기도 한다. 모두 15가지쯤 되는 질문을 한다. 결과를 종합해 6단계 분류체계에 따라 참가자의 와인 기호를 판별해 준다. 기호에 맞는 와인 리스트도 만들어 준다. 1시간쯤 걸리며 참가비는 15유로. 라 와이너리는 보르도에서 D1도로를 20㎞ 남짓 달리다 보면 있다. 오렌지색 거대한 바람개비 조형물이 들판 가운데서 손짓하듯 돌아가고 있는 곳이 입구다.

샤토 방문과 포도 수확, 블렌딩 체험
샤토 방문은 인터넷이나 전화로 예약해야 한다. 메도크와인협회 홈페이지(www.medoc-bordeaux.com)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홈피 메뉴에서 ‘샤토’를 클릭하면 검색 창이 열린다. 이름을 입력하면 샤토의 기본정보가 뜬다. 연락처와 역사, 방문은 가능한지, 어떤 와인을 생산하는지 알 수 있다. 인터넷 링크가 돼 있어 샤토의 홈피로 바로 연결도 된다.

보르도관광청을 이용해도 좋다. 특급 샤토는 3개월 전에 예약해야 방문이 가능하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상관없다. 영어로 소통된다. 샤토에 가면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둘러보고 대표 와인을 시음한다. 기본 투어 비용 6유로 안팎. 샤토 팔루메이, 샤토 루덴에서는 시음과 블렌딩 실습도 한다. 단일 품종의 와인을 맛보고 자기 입맛대로 서너 가지 와인을 배합한다.

블렌딩을 마치면 샤토의 완제품과 비교하며 자신의 와인 미각을 진단한다(10~30유로). 실습 가이드는 때로 당황스러운 질문도 한다. 와인 배합 비율을 미각으로 맞혀 보라는 것이다. 머뭇거리면 자기들도 틀리는 경우가 많으니 해 보라고 권한다. 주저할 것 없다. 느낌대로 쓰면 된다. 기자는 네 종류를 써 한 가지만 맞았는데 초보자로는 아주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수확 철에는 대부분의 샤토가 방문객을 사절하지만 팔루메이는 예외다. 손으로 수확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현지 인부들과 대화하며 점심을 함께 먹고 와인 담그는 과정을 참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25유로).

메도크의 5대 샤토인 라피트 로실드, 무통 로실드(포이악 지역)와 울타리를 맞대고 있는 샤토 라퐁로셰(생테스테프 지역)도 찾아가 볼 만하다. 인상이 후덕해 뵈는 60대 주인 테스롱은 외로움 타는 한국의 농촌 어르신처럼 사람을 반긴다. 서울에도 몇 차례 다녀간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기 때문에 시간이 많다고 했다. 기자 일행에게 언제라도 놀러 오라며 짧은 만남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메도크와인협회 홈피에도 방문이 가능한 때를 ‘일하는 날은 언제나, 예약하고 오면 된다’고 적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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