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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서 1500명 총 맞아 죽었지만, 서독은 동독과 계속 대화”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되던 당시 안보수석으로 헬무트 콜 총리를 보좌했던(1983~90년) 호르스트 델칙 박사의 조언이다. 77~82년 독일 기민·기사당 연합 원내대표를 지내고 현재 한독기술협회 총장인 그가 최근 서울을 방문했다. 통일되기까지 동·서독이 어떻게 갈등을 관리했는지 22일 들어봤다.

-최근 금강산에서 북한군의 사격으로 중년 여성이 사망해 남북 관계가 얼어붙었다. 통일 이전 동서독 사이에서도 이런 사태가 있었나.

“분단 시절 베를린 장벽에서 1500여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때마다 서독에는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책임자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우리는 기록 보관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기록하고 항의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이 정책을 흔들 수는 없었다. 서독의 근본적 목표는 그런 사태가 더 발생하지 않게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긴 통일 과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것은 목표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다.”

-갈등이 양독 대화를 단절시키지 않았나.

“49~90년 독일 역사는 상처투성이였다. 61~62년 긴장은 아주 높았다. 소련은 베를린에 장벽을 세웠고 소련 정찰기가 서독 깊숙이 날았다. 미군과 소련군은 대치했다. 83년 미국이 서독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자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을 각오한다는 식으로 나왔다. 그런 큰 위기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서독은 동독과 대화를 계속했다.”

-지금 남북 사이엔 두 차례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 10·4 선언을 인정하느냐를 놓고 대립하고 있다. 양독 시절 비슷한 갈등이 있었나.

“그랬다. 기민·기사당 연정이 만든 기본 조약들을 의회에서 비준받는 게 걱정이었다. 야당의 반대 때문이었다. 집권당이 다수여서 통과는 됐다. 당시 연방 상원 다수당도 야당이었는데 인준했다. 독일 전체를 보고 한 것이다. 야당은 집권당이 된 뒤 조약을 계승했다. 이게 책임 있는 정치다.”

-서독의 동독 지원이 갈등을 일으켰을 것 같다. 한국에도 ‘퍼주기’ 논란이 있다.

“통일 이전 서독에선 동독의 독재자와 대화할지, 고립시킬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서독의 퍼주기가 많았고 받은 것은 적었다. 서독은 동독에 2000억 마르크를 지원했다. 동·서독 기본 조약에도 비판이 제기됐다. 갈등은 야당보다 집권당 내에서 더 심했고 시민사회로 번졌다. 비판자들은 ‘공산주의자를 돕는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서독 정부의 목표는 동독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원한 것이다. 동독은 주민들의 서독 여행을 허락했다. 한국에서의 양상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남한이 북한에 주는 게 받는 것보다 많을 것이다. 북한은 변하지도 않고 계속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북한 내부의 변화를 절실히 원한다면 지원할 필요가 있다. 분단은 안보에 많은 돈을 들어가게 만든다. 통독 뒤 군사비가 크게 절감됐다. 분단 시절 군사비에 비하면 통일 비용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판자들은 그 부분을 잊고 있다.”

-귀하는 통독 과정에서 미국이 중요했듯 남북 통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위상은 변했다. 반미 감정도 있다. 중국의 중요성도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주둔한 미군에 대해 젊은이들은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반미 감정을 표출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통독은 불가능했다. 달라지긴 했어도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이며 한국은 안보 지원을 받는다. 중국도 중요하다. 중국에는 통일 한국이 적이 아님을 확신시켜야 한다.”

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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