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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 왼손에 찻잔 20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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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청두에서 영업하던 천변 찻집(茶館)의 풍경. -김명호 제공-
기원이 불분명할 정도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차를 마셔 왔다. 그러나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극소수의 기호품이었다. 당대(唐代)에 와서야 생활문화의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었다. 혼례 때 차를 신랑집에 예물로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급 소비품이었다. 당 태종도 딸을 출가시킬 때 차를 예물로 보냈다.

송대(宋代)에 일반 백성의 집에서도 차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신랑 측에서 청혼할 때 차를 보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차례(茶禮)였다. 청(淸) 말까지 차례는 성혼(成婚)을 의미했다. “현숙한 여자는 두 집의 차를 마시지 않는다”는 재미있는 말이 생겨난 것도 청대였다. 『홍루몽(紅樓夢)』에도 차를 선물로 보낸 후 “우리 집 차를 마셨으니 너는 이제 남의 집 며느리 되기는 다 틀렸다”며 여주인공을 놀려 먹는 대목이 나온다. 지금도 농촌 지역에선 정혼(訂婚·약혼을 뜻함)을 ‘수차(受茶)’라고 한다. 생계형 찻집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송대였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는 차에 관한 한 중국 최초의 것이 가장 많은 도시다. 음차(飮茶)의 발원지였고, 야생 차나무의 인공 재배를 시작한 곳도 청두 인근이었다. 중국 최초로 명차 소리를 들은 차를 배출한 곳도 청두였고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중국 최초의 인공 차밭인 청봉다원(淸峰茶園)도 청두의 몽산(蒙山) 꼭대기에 있었다. 고대의 차 재배자로 밝혀진 인물 중 가장 시대가 빠른 우리전(吳理眞)의 석실도 몽산에 있다. 서진(西晉)시대 ‘촉구(촉구)’라는 여인이 중국 최초로 차관(茶館)을 개업해 ‘차죽(茶粥)’을 만들어 판 곳도 청두였다. ‘마파두부’와 함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차(油茶)’의 원조가 바로 차죽이다. 촉구는 청두에 널려 있는 차관 주인들의 비조(鼻祖)인 셈이다. 당대에 생겨난 중국 최초의 대규모 기업형 차밭도 청두에 있었다. 남녀 고용인이 약 100명이었다.

청두의 차관들은 숫자 면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 청 말에 454개의 차관이 있었다. 1935년 청두에서 발행하던 ‘신신(新新)신문’에 의하면 당시 599개의 찻집이 있었고 매일 평균 12만 명이 찻집을 찾았다. 청두 인구가 60만 명 미만일 때였다. 항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청두시 정부 통계에는 차관이 614개로 돼 있다.

근래에 와선 이런 통계 숫자를 볼 수 없다. 너무 많아 통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대로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골목마다 차관이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공원과 명승지는 물론 모든 직장의 문화시설에도 차관이 있다. 극장 휴게실에도 차관이 있고 국도 양편에도 간이 차관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청두인은 예전부터 팔받침이 있고 느긋하게 뒤로 기댈 수 있는 대나무의자에 앉아 탁자 위 찻잔 속의 차를 바라보는 것을 삼면이 대나무인 숲 속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는 것과 동일시했다. 종업원의 호칭도 ‘차박사(茶博士)’였다. 왼손 손가락 사이에 찻잔을 20개 이상 포갤 수 있어야 하고 찻잔에 펄펄 끓는 물을 한순간에 채우며 한 방울도 탁자에 튀는 법이 없다.

아편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의 발발 원인은 중국 차였다. 수천 년간 예의와 한적(閑寂)의 상징이었던 차가 세계질서를 바꿔놓고 한동안 중국인에게 굴욕을 안겨준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수천 년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베이징올림픽 선수촌에 차관이 개설됐다. 중국 차와 청두의 차박사들이 전 세계를 향해 어떻게 새로운 영향력을 발휘할지 기대된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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