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차 타고 무계획 전국일주
『하이킹 걸즈』김혜정 지음, 비룡소 펴냄
폭력소녀 은성과 절도소녀 보라는 소년원에 가는 대신 ‘실크로드 도보 여행’을 선택한다.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 1000㎞. 찜통 더위에 흙 길을 하루 8시간씩 걷는 좌충우돌 소녀들. “내가 가는 곳은 오아시스일까, 신기루일까? 상관없다. 걷다 보면 언젠가는 오아시스가 나올 테니까.”
더위를 날려 버릴 특별한 여름 여행…. 올해 나는 홀로 열차를 타고 전국일주를 할 것이다. 한국철도공사에서 이번 여름에만 판매하는 ‘내일로티켓’. 단돈 5만4700원으로 7일 동안 열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단다. 만 18세부터 24세까지만 구입할 수 있는데, 다행히 생일이 지나지 않은 나는 턱걸이로 살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계획은 딱 한 가지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나기’. 이제까지 나의 여행은 철저한 계획 아래서 이루어졌다. 1일치 가야 할 장소, 먹어야 되는 음식, 숙박할 곳 등등…. 이미 정해져 있는 동선 아래서 나는 인형처럼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쉬려고 떠난 여행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배낭과 열차 티켓만 가지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 계획이 없어 조금 헤매면 어떠랴. 헤맸던 기억이 또 하나의 여행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떠나려는 마음만으로 이미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저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압구정 다이어리』 정수현 지음, 소담 펴냄
‘압구정 로데오 사파리’라고 들어 보셨는지. ‘청담동 언덕 히치하이킹’은? 눈치론 알지만 직접 물어보긴 주눅 드는, 압구정 젊은이들의 사교생활 상세 보고서. 기분 풀러 병원 가고, 풀메이크업으로 헬스장 가고, 헌팅의 명당 광림교회를 누비는 명품족 처녀들의 일생을 건 도련님 잡기 대작전.
지난달 ‘잭팟의 꿈’을 안고 날아간 라스베이거스. 첫날 지갑에 있던 100달러짜리 3장이 6장으로 늘어났다. 마치 마술처럼. 이대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엄마! 나 집에 안 가. 계좌번호 불러 봐. 얼마면 돼?” 하고 말하는, 꿈같은 상황이.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결국 모든 돈을 잃었다. “젠장” “어쩌지”를 연발하며 카지노 주위를 서성일 때 다이아몬드 시계가 눈에 띄는 백금발의 남자가 내 눈을 응시하며 다가왔다. ‘어머… 이 사람 날 유혹하려는 거구나.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빈털터리가 된 여성들이 돈 많은 남자를 유혹해 차비를 구한다는데 아마도 날 그렇게 봤나 보군.’
난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란 영어를 멋지게 구사하려 했으나 좀처럼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손을 휘휘거리며 애써 생각해 낸 “I am not an easy girl. Go away~.”를 빠르게 내뱉은 후 멀리 도망쳤고, 결국 한국으로 전화했다. 거만한 선언 대신 SOS를 청하기 위해. 근데 만약 그때 그가 날 유혹하려던 게 아니라면 어쩌지. ‘아가씨 치마가 올라갔어요’ 같은 얘기를 하려던 것일 수도 있잖아. 이런, 창피해서 생각하기도 싫다.

항공권이 있어야만 술술 써질까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문학동네 펴냄
그러고 보니 수많은 007 영화의 본드걸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본드걸이라는 일회용 신분에 작별을 고하고 정규직 스파이 013이 되어 돌아온 미미양. 총과 살인면허를 받았지만 등평도수의 경신술, 전서구에 쪽지를 매달아 보내고 게다짝을 암기로 쓰는 미녀 스파이의 코믹한 활약이 펼쳐진다.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소설가 K는 내게 제주도 오름 일주 자전거여행을 제안했다. 제주도도, 오름도 다 좋은데 중요한 건 내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제주도보단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의 나라 터키에 가서 문학적 자극을 받고 싶었다.하지만 만만찮은 성수기 경비로 인해 터키의 꿈도 멀어졌다. 대신 엄마와 함께 일본 규슈에 다녀오기로 했다. 바쁘게 비행기와 호텔을 알아볼 즈음 독도 문제가 불거질 줄이야! 뉴스를 시청하던 엄마는 말씀하셨다. “일본 여행은 그만두자.”결국 나는 터키도, 일본도 아닌 경상남도 남해 노도로 떠났다. 『구운몽』『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김만중이 피죽으로 연명하며 글을 썼다는 초가집 터는 한여름 뙤약볕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래, 바다 건너 이국으로 나갔다 와야만 소설이 술술 써지겠니? 중요한 건 한양에서 천 리 떨어진 외딴섬에서 벼려진 정신, 홀로 남은 자의 고독, 바로 그것이겠지. 소설을 쓰는 일엔 항공권이 아니라 다만 종이와 연필이 필요할 뿐이란 걸 나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나 보다.

울고 있는 당신을 웃길 거야
『핑퐁』 박민규 지음, 창비 펴냄
중학생 ‘모아이’와 ‘못’은 하루하루가 괴로운 왕따들. 소년들은 그저 ‘핼리 혜성이 지구와 부딪쳐 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날 빈 벌판에 홀로 놓인 탁구대를 발견한다. 이후 세계는 그들의 탁구 동작 하나하나와 맞물려 조금씩 엄청난 국면으로 나아가는데…. 이후엔 “가까운 탁구장을 찾아주세요.”
재미있게 살기가 미안한 여름이다. 너무 힘들고 너무 아프다. 그것이 올해 한국의 여름 풍경이다. 나 혼자 재미있으면 뭐 하나, 당신도 함께 재미있어야지. 나이가 들면서 내가 찾은 재미의 기준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요, 올여름 구상한 가장 재미있는 계획은요(이것이 원고를 청탁받은 이유다)?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 그런 계획이 있기는 하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인력시장과 심야만화방을 반드시 탐방해볼 계획이다. 인력시장과 심야만화방을 오가며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자욱하던 그곳의 담배연기와 땀내, 코를 찌르던 발냄새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다시 느끼고 점검하고 싶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와, 그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나는 몇 편의 글을 쓸 것이다. 모쪼록 고단한, 2008년 여름의 모두를 위한 글이라면 좋겠다. 내 삶은 딱 이 정도면 충분하다. 보다 재미있어야 할 것은 지금 울고 있는 당신들의 삶이다.
더위 이기는 것도 사업
『키조개』 한승원 지음, 문이당 펴냄
키조개의 전설이 전해오는 남해의 연꽃바다. 과부 허소라가 별장을 지었다. 51세에도 달거리를 하는 그녀는 ‘자궁 권력’의 소유자. 변호사 이계두, 매실 과수원 박남철, 잠수부 영후, 사슴농장 영재까지, 호시탐탐 노리다 허방에 빠지는 수컷들. 풍만한 에로티시즘과 품위 있는 스릴러의 결합.
나는 피서지로 떠나지 않는다. 더위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나 운명 같은 것. 어디 간들 더위가 없을까. 더위를 피해 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오고 가는 길에 지치고 피서지에서 고달파지게 마련이다. 운전할 줄 모르는 까닭으로 차가 없는 나에게, 무더위 속에서의 여행은 자칫 몸과 마음에 독을 더할 수 있다.
나는 작가실 안팎에서 더위를 극복한다. 여름을 사냥해 버린다. 내가 나의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살려고 하듯이. 더위 이기는 일을 나는 하나의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30분씩 예초기로 차밭과 정원의 풀을 깎는다. 땀을 멱 감듯이 흘린 다음 찬물 목욕을 함으로써 느껴지는 상쾌함을 즐긴다. 여름에 냉방 속에서만 살면 땀구멍이 막혀 해롭다. 땀구멍이 여닫는 훈련을 시켜 주어야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밥 먹고 차 마시고 책을 읽다가 낮잠 한숨 자고 나서 다시 책을 읽는 맛도 좋다. 여름 나기의 최고 즐거움은 책 읽기다. 이 세상에서 책처럼 고귀하면서도 싼 물건이 있을까.
老화가의 말씀이 넘치던 폐교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지음, 뿔 펴냄
‘미소에 재워 구운 흑대구’로 유명해진 21세 요리사 한유나, 친아버지를 찾겠다고 13세에 가출, 일본 나가사키로 흘러 들어왔다. 철없는 엄마가 바다 건너 보내오는 이야기를 읽으며 아버지가 일한다는 가죽공장을 찾는 사이 어느새 진정한 가족으로 다가오는 음식점 ‘넥스트 도어’의 괴짜 동료들.
좋은 말도 열 번쯤 들으면 싫다. 하물며 백 번쯤 듣는다면? 공포다. 가족과 평창엘 다녀왔다. 2박3일. 시골 폐교를 얻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한 노화가의 작업공간. 대학 스승의 소개로 물어 물어 찾아갔던 것인데…. 스승께 도착 인사를 드리다가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폐교 같아요, 라고 말할 뻔했다. 폐교 분위기는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적응할 수 없었던 건 노화가의 옳은 소리. 먹는 것에 대해, 자는 것에 대해, 숨 쉬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자연과 우주와 삶과 존재와 믿음과 사랑과 교육과 국가와 민족과 정치와 경제와 강원도와 평창과 메밀꽃과 하늘과 바람에 대해… 아, 노화가는 정말, 쉬지 않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십 가지의 전통차를, 잠도 재우지 않고, 쉴 틈 없이 마시라고 들이대는 바람에 첫날부터 배가 남산만 해졌(!)다. 선식이라며, 끼니 대신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곡식가루 탄 물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또 먹는 것에 대해, 자는 것에 대해, 숨 쉬는 것에… 꼼짝없이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간 온통 정신이 없었다. 떠나는 날. 노화가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가야 하니 우리 차를 타고 가야겠다며 나섰다. 윽, 밀폐된 차 안에서 서너 시간을 함께? 그 다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도저히 여기에다 말할 수 없다.
잉카 돌처럼 단단한 ‘혜초의 길’
『혜초』 김탁환 지음, 민음사 펴냄
서역 원정길과 천축 구법길이 맞물린다.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는 사막에서 흑폭풍에 휘말렸다가 모래 무덤 아래 신음하던 신라 승려 혜초를 발견한다. 그들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깨달음. “마음으로 하는 여행과 몸으로 하는 여행이 같음을 알 때까지 정진하세요.”
탈고하면 꼭 여행을 떠난다. 나 자신에게 주는 휴가다. 『혜초』 최종고를 넘긴 후 페루에 다녀왔다. 페루 작가들과 국제 심포지엄도 열고, 잉카문명을 답사하기 위함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도반(道伴)이다. 도반이 편하면 여정이 즐겁고 도반이 불편하면 여정이 피곤하다. 이번 여정에서 한 방을 쓴 이는 시인 이승하였는데, 그는 최고의 도반이었다.
그의 말더듬이 뭉크와 욥의 슬픔은 문청 시절 내 글쓰기의 전범이었다. 그가 페루 시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번역해 온 시는 놀랍게도 ‘혜초’였다. 우리는 낮에는 잉카문명의 흔적을 찾아 고산병을 이겨 가며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오르내렸고, 밤에는 와인과 맥주를 앞에 놓고 잉카의 길과 혜초의 길, 끝없이 걷는 자의 고독과 발바닥의 무게에 관해 토론했다. 그리고 여행자 혜초의 글쓰기가 잉카의 돌과 같이 단단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지진이 몰아쳤을 때 스페인의 성벽은 모두 무너졌지만 잉카의 성벽은 끄덕없었다. 나도 그처럼 강건하게 쓰고 싶었다. 글과 여행과 삶이 지닌 다양한 공통점에 탄복하며 잠 못 이룬 잉카의 밤. 이 밤에도 도를 구하기 위해 가파른 산을 오르는 발걸음들이 힘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