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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제복은 국가의 피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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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7년 전에도 비슷한 사진이 있었다. 그때는 린치의 피해자가 국무총리였다. 1990년 1월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했다. 거대 여당의 탄생은 거대한 역풍을 불렀다. 91년 4월부터 대학생과 경찰은 거칠게 부닥쳤다. 시위대의 화염병과 쇠파이프에 동료가 부상하자 흥분한 진압경찰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사망했다. 시위의 불길은 전국으로 타올랐다. 극렬 학생들이 분신했고 극렬 시위대는 쇠파이프·화염병을 들었다. 5월 말 노태우 대통령은 총리와 4부 장관을 경질하고 내각제 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역사는 비등점을 향해 달려갔다.

사건(사진)은 6월 3일 저녁에 터졌다. 신임 정원식 총리는 취임 전에 맡았던 대학원 강의를 끝내려고 외국어대에 갔다. 교육부 장관 시절 전교조를 탄압했다며 학생들이 정 총리에게 린치를 가했다. 학생들은 총리의 목을 조르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으며 발길질을 해댔다. 몇몇은 총리에게 밀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총리는 30여 분간 끌려다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총리 공관으로 탈출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날 밤 TV 뉴스에서 사건을 보았다. 대통령은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대학에서 학생들이 스승에게 이런 행패를 부릴 수 있는가.” 대통령의 분노를 전해들은 각료와 참모들은 밤 10시30분쯤 삼청동 안가에 모였다.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이 회의를 주재했으며 내각에서는 내무·법무·공보처 장관, 청와대에선 정무·행정수석, 총리실에선 비서실장·행조실장이 참석했다. 대학생들의 패륜 행위로 역사는 방향을 틀었다. 폭력 주도 학생들은 법정에 섰고, 재야의 대책회의는 전국시위 계획을 포기했다.

‘물태우’라고 세상이 놀렸던 노태우 대통령도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불도저라는 이명박 대통령은 제대로 분노할 줄을 모른다. 발가벗겨진 경찰들의 사진이 신문에 실린 그날 아침,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일이 벌어져야 한다.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특별회견이라도 하고 죽어가는 법과 맞는 경찰을 살리겠다고 선언했어야 한다. 총리는 법무·행정안전부 장관과 검찰총장·경찰청장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어야 한다. 폭력시위 사태 내내 그들이 그런 직무를 유기해 젊은 경찰의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나라의 법은 휴지처럼 뒹굴었다.

독재시절 제복은 정권의 갑옷이었다. 하지만 민주시대에 제복은 국가의 피부다. 경찰을 발가벗기는 것은 국가의 피부를 찢는 것이다. 제복을 찢고 경찰의 맨살을 패는 것은 국가에 대한 패륜행위다. 국가의 정신에 밀가루를 뿌리는 것이다. 제복이 유린당하는데도 나라는 손을 놓고 있다. 법무·행정안전부 장관과 검찰총장·경찰청장 중 누구라도 발가벗겨진 제복에 피 같은 울분을 터뜨린 적이 있는가. 대통령은 사인(私人)의 상가를 조문할 시간은 있어도 경찰병원을 찾을 시간은 없단 말인가.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