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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승만과 가네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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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30세의 이승만이 배로 태평양을 건너고 열차로 미 대륙을 가로질러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1904년 세밑이었다. 임무는 미국 조야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 의도를 설명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민영환 등 대한제국 중신들이 이승만을 밀사로 고른 이유는 5년 반 동안 옥중에서 갈고닦은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이듬해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대통령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약소국 청년의 하소연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을 만나기 닷새 전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 상태였다.

일본의 대미 외교는 주도면밀했다. 이승만보다 먼저 워싱턴에 와 있던 일본 특사 가네코 겐타로는 루스벨트와 하버드대 입학 동기로 크리스마스 카드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루스벨트는 가네코가 선물한 『무사도』의 영문판을 읽고 일본에 푹 빠졌고, 일본인 고단자로부터 매주 세 차례 유도를 배웠다. 그 덕에 가네코는 문턱 높은 백악관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21세기에 각광받는 ‘소프트 파워’ 외교를 일본은 이미 100여 년 전에 구사한 셈이다. 그 결과 루스벨트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에 간섭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루스벨트의 중재로 1905년 8월 체결된 러·일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 1조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지도·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고 돼 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낸 일본은 석 달 뒤 한국의 외교권을 뺏는 을사늑약을 맺기에 이른다. 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서 펼친 외교전은 이처럼 시작 전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선교사가 써 준 소개장 몇 통에 의지한 미국 초행길의 이승만은 가네코에 족탈불급이었다.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 영유권 표기를 ‘주권 미지정’으로 바꿨다가 일주일 만에 철회했다. 하지만 외교전에서 큰 승리라도 거둔 양 자화자찬할 일은 아니다. 말 그대로 원상회복일 뿐,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립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공식 입장도 그대로다. 일본도 가만있지 않을 기세라 곧 2라운드의 공이 울릴 것이다. 100년 전 가네코를 보냈던 일본의 치밀함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