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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년 전 포츠머스처럼’ 집요한 고무라의 후예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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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도 쟁점화 노력은 끈질기다. 외무성은 일본 특유의 연구 모임인 벤쿄카이를 통해 의원들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저변을 넓히고 힘을 얻는다. 독도 영유권 표기 문제로 미국으로부터 한방을 맞았다고 주저 앉을 그들이 아니다. 민간부문도 이론과 행동으로 역할을 분담해 100여개 사이트를 중심으로 사이버 독도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외무성의 힘과 전략, 민간의 움직임을 중앙SUNDAY가 취재했다.

<다음은 전문>

일본 외무성은 최근 한국 외교통상부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한승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29일 독도를 방문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A4 용지 한 장으로 된 서한에서 일본 측은 김영삼 정부의 독도 접안시설 건설, 노무현 정부의 독도 관광 허용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한국 정부의 독도 관련 조치들을 샅샅이 주시하면서 적시에 대응 조치를 하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은 매년 연말 아주국 명의로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문서를 꼬박꼬박 보낸다. 독도 관광이 허용된 2005년 이후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고 한다.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 영유권 표기를 ‘주권 미지정’에서 ‘한국’으로 원상회복한 지난달 30일,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방한 이후 미국에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다시 수정하도록 요청할 계획”이라며 “비공식 채널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독도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공세는 집요하다.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열도)의 땅을 개인에게 불하해 놓고 정부는 한 발을 빼는 것과 정반대다.

2006년 6월 21일 서울 외교부 청사 17층 접견실.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유명환 당시 외교부 제1차관을 만났다. 일본의 독도 해역 배타적 경제수역(EEZ) 탐사 문제를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이 탐사 계획을 발표한 뒤 한국은 “들어오면 나포할 것”이라고 선언해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흐를 때였다. 일본 측은 ‘탐사 강행→선박 나포’ 상황이 펼쳐지면 국제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할 속셈을 갖고 있었다. 독도 문제의 국제 쟁점화 전략이었다.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여야 의원들과의 ‘벤쿄카이(연구모임)’를 통해 교감을 이룬 ‘독도 탐사 계획’은 그런 의미에서 썩 괜찮은 전술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한국 외교부는 해양법재판소에 ‘관할권 유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한·일 공동 탐사를 제안하는 전술을 펼쳤다.

1905년 9월 러일전쟁 뒤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 외교의 쾌거’로 꼽힌다.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했다. 이 조약을 체결한 고무라 주타로 외상은 일본 최고의 외교관으로 존경 받는다. 외무성의 한 관료는 “외교관 선배들로부터 가장 먼저 추천 받은 책이 바로 고무라 전기”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군부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병합 프로그램을 밀어붙일 때 이를 주도했다. 일본 외무성은 군부와 함께 일제의 ‘대동아공영’의 야욕을 추진한 두 축이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 고무라의 후예들은 독도 영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오늘도 전방위 외교전을 펼친다. 일본에서 10여 년간 공부한 이명찬(고려대 유민국제관계연구원) 박사는 “미국 지명위원회의 지명 변경은 일 외무성과 관련 단체의 실무 차원 로비가 먹힌 결과”라고 분석했다. 일 외무성의 독도 관련 인력이 23명(한국은 8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박사는 “일본은 5∼6년 넘게 독도를 전담하는 인력들이 포진해 시스템과 노하우 측면에서 한국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에서 발간되는 논문과 저서에 ‘독도’보다 ‘다케시마’라는 지명을 훨씬 많이 쓰는 현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외무성은 한·일 간의 독도 싸움을 총지휘하는 사령부나 마찬가지다. 외무성은 4월 인터넷 홈페이지에 ‘다케시마 영유권에 관한 우리나라의 일관된 입장’이라는 글을 게시했다. ‘다케시마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라는 14쪽 분량의 이 게시물에서 “일본이 다케시마를 실효적으로 지배해 영유권을 확립하기 이전에 한국이 이 섬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가 한국 측으로부터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영토 교육을 맡은 문부과학성은 석 달 뒤 이를 받아 중학교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했다.

일본 외무성의 힘은 요즘 국제법국(옛 조약국)에서 나온다. 아시아대양주국도 있지만 2004년 외무성 개혁과정에서 국제법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약국이 일본 외교의 ‘척추’로 불린다. 엘리트들이 모인다. 구리야마 다카카즈 등 90년대 이후 임명된 8명의 외무성 사무차관 중 5명이 조약국장 출신이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미·유럽의 유명 변호사와 학자들을 고용해 국제분쟁을 세 곳의 국제법정(사법재판소·해양법재판소·형사재판소)에서 해결하는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4건의 해양 관련 분쟁을 국제재판소에서 해결한 경험을 쌓았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에 유리한 독도 관련 지도를 사기 위해 수억원의 거금을 아끼지 않는다. 프랑스 포경선의 지도 표기에 따라 독도가 ‘리앙쿠르암’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한국 외교부 조약국의 사업예산은 연 16억원에 불과한 반면 일본은 300억원이 넘는다”고 지적했다.

일본 특유의 연구모임인 ‘벤쿄카이’도 한몫한다. 외무성 관료들은 ‘일본의 미래를 생각하는 의원모임’이라는 우익 성향의 연구모임에 많이 참석한다. 자민당의 의원연구회인 정무조사회가 여러 이름으로 공적 모임을 만들지만 이 모임은 참여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모임은 ‘독도 탐사 계획’도 논의했고, 교과서 해설서 작업에도 관여했다.

조약국 출신 외교관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속속 진출하는 것도 한국을 위협하는 변수다. 마사코 왕세자빈의 아버지인 오와다 히사시 전 외무성 사무차관은 조약국장 출신이다. 그는 2003년 국제사법재판소(ICJ) 판사로 옮겼다. 2005년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 재판관에 선임된 야나이 슌지 전 주미대사도 조약국장 출신이다. ITLOS는 해양자원 개발과 EEZ를 둘러싼 분쟁을 중재하는 곳이다. 독도를 비롯한 북방 4개 섬, 댜오위다오 등 주변국들과의 영토 문제를 일선에서 담당하던 외교관들이 국제분쟁의 중재자로 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78년 아카타니 겐이치가 일본인 최초의 유엔 사무차장이 된 이후 지금까지 7명의 사무차장을 배출했다.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갈수록 세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일본의 경제력이 작용하고 있다. 일본의 유엔분담금 비율은 16.6%로 미국에 이어 둘째로 높다. 2006년 공적개발원조(ODA) 규모 역시 세계 3위(116억800만 달러)다. 일본 외무성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
일본 외무성의 힘은 이번 독도 사태 때 고스란히 드러났다.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 표기를 ‘주권 미지정’에서 다시 ‘한국’으로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무부는 “영토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해결할 문제”라며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라면 온 국민이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중국도 이번에는 조용하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올해 두 차례나 초청해 ‘전략적인 호혜관계’를 다져놓은 덕분인지 중국 정부는 독도 문제에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내년 1월 부시 대통령이 퇴임하면 독도 문제에 대한 공세를 재개할 전망이다. 일본 언론들은 “데이터베이스 표기에 몇 가지 잘못된 점이 있어 일단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는 미 국무부의 입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외무성이 앞으로 어떻게 뛸 것인지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외무성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고도의 도발 전술을 병행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9월에 새로 발행하는 고교 학습지도요령에 독도 영유권 내용을 포함시킬 계획이다. 내용 역시 중학교용보다 더 구체적일 수 있다.

조심해야 할 대목은 독도 주변에서 측량작업 등 선박을 동원한 도발이다. 과거에도 일본은 독도 주변 해역의 측량조사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한국 측의 방해 조치와 측량선 나포를 ‘유엔해양법조약 위반행위’라고 비난하면서 해외 홍보에 활용해 왔다. 또 위키피디아 같은 인터넷 사이트와 국제수로국(IHO) 등 국제기구, 미·유럽을 상대로 독도 표기를 변경하도록 요구하면서 국내에서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olive@joongang.co.kr] 서울= 안성규·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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