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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추악한 진실 폭로한 펜을 든 전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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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더 뉴스 -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오귀환 옮김
아시아네트워크, 324쪽, 1만6000원

  뉴스가 뉴스 대접을 못 받는 시대다. 정보는 넘쳐나고 인터넷은 어린 아이도 뉴스 생산자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매체간 이념 대결, 왜곡 보도 공방이 계속되면서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이 책이 ‘더 뉴스’라는 발칙한 제목을 단 건 일단 뭔가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책은 이름값을 한다. 네팔·인도네시아·캄보디아·태국처럼 가깝지만 우리가 그다지 아는 것 없는 나라에서 단내 나게 뛰어다녔던 9명 기자들의 특종기다. 이들의 펜은 부패한 대통령을 뒷문을 통해 도망치게 만들었고(필리핀), 1만5000명을 죽음으로 빠뜨린 독가스 누출 사건을 예지하고 경고했다(인도).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2년간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배짱 좋게 유명 죄수 인터뷰 등 각종 특종을 터뜨린 기자(인도네시아), 엽기적인 왕세자 총기난사 사건으로 혼돈에 빠진 국가에서 유일하게 음모론에 휘둘리지 않고 ‘확인한 사실’을 전한 소신 있는 기자(네팔)도 등장한다. 이들이 전한 뉴스는 들인 노력과 파장에서 가히 오늘날 마구 쏟아지는 뉴스들과 격이 다르다.

그렇다고 읽기 민망한 자화자찬은 아니다. 이들의 고생담과 취재 뒷얘기 속에는 아시아의 현재가 팔딱거리며 살아 있다. 예를 들면 1998년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프 에스트라다는 부패한 지도자의 전형이다. 취임식에서 “대통령직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연기(퍼포먼스)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던 이 전직 영화배우는 모델·스튜어디스 등 여성 4명과 무절제한 관계를 맺고 이들을 위한 웅장한 맨션을 여럿 지었다. 미니극장·헬스클럽·미용실 등이 들어간 저택을 짓는 비용은 불법 도박업자들에게 끌어 모은 뇌물로 충당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이들의 대변자라는 로빈 후드 이미지를 고수했다. 진실을 폭로한 것은 ‘펜을 든 여전사들’로 알려진 PCIJ(필리핀탐사저널리즘센터)였다. 여성 기자 4명은 아무도 감히 못할 때 대통령과 가족 명의 회사, 각종 금융 기록과 토지대장 등을 파헤쳤다. 이들의 보도에 국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대통령은 물러난다.


이뿐 아니다. 눈길 주는 이 없어도 혼자 북치고 당구 치며 8면짜리 신문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돌리던 인도의 ‘촌놈 기자’가 어떻게 뉴욕타임스가 도와달라 구애하는 대상이 됐는지 생생하게 펼쳐진다. 뉴욕타임스가 그를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무시하는 모습에는 서구에 당하는 아시아가 교차된다. 킬링필드로 유명한 폴 포트에 접근하기 위해 2개월 반 동안 걸어서 1000㎞를 따라다닌 기자의 집념에는 베트남 침략군에 맞서는 캄보디아가 녹아있다.

서구 기자의 기사로는 알 수 없던 오사마 빈 라덴의 다른 면모도 본다. “난 아내가 3명인데 아이들이 몇 인지는 잊어버렸다”는 농담이나 “백만장자가 맞느냐”는 질문에 재산 규모를 밝히는 대신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나는 여기(마음)가 가니(아랍어로 부자)다”라고 말하는 화법 등이 그렇다.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까지 아시아 매체보다 뉴욕타임스라는 휘황찬란한 이름을 더 믿었던 이들이라면 찔리는 게 많을 책이다. 마음 깊숙이 내재돼있던 서구중심주의와 아시아 경시가 까발려지는 느낌이다. 단지 뒤떨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나오는 뉴스가 아니라, 인류 본연의 과오에 대한 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촌놈 기자’가 ‘더 뉴스’를 만들고 있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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