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로 세로 각각 21m의 거대한 무대. 형형색색의 외피를 두른 20t급 굴착기 네 대가 놓여 있다. 잔잔하면서도 격정적인 음악이 흐르면, 굴착기들은 금속성의 차가운 몸짓을 보여 준다. 폐허가 된 세상. 높이 8m에 달하는 대형 인형이 기계들의 왕국에 군림하고 있다. 은색 ‘변종 인간’들에 희생된 소녀가 흰옷을 입은 여신으로 거듭난다. 여신의 아름다움에 감화된 기계들은 그 춤에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육중한 ‘현대의 프랑켄슈타인’들은 중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날갯짓에 어우러져 함께 춤춘다.
- 굴착기 등장하는 ‘몬스터 발레’ 등 거리 공연의 색다른 맛
미리 내다본 창작무용극 ‘몬스터 발레’의 조감도다. ‘몬스터 발레’는 9일부터 열리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2008’ 여름 축제 행사의 하나다. 개막일부터 나흘간 오후 9시 한강 여의지구 강변 무대를 장식할 이 작품은 특히 발레리노 김용걸이 안무를 맡아 화제가 되고 있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 유일의 동양인 솔리스트 김용걸이 처음으로 단독 안무를 하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만난 그는 작품에 직접 출연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낯선 무대에서 실험적인 작품으로 새로운 관객과 만날 거란 기대감에 설레고 긴장된다”고 말했다.
굴착기와 발레가 강변서 어우러지다
공사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중장비가 무대에서 무용수와 어우러지는 것은 국내 창작 공연으로는 처음이다. 거대한 굴착기가 무대장치 속 오브제가 아니라 인간과 실연(實演)이 가능케 된 것은 제한된 실내 공연장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번 페스티벌의 총예술감독인 로저 린드는 이 ‘만남’을 가리켜 “사람의 아름다움처럼 기계 역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고, 둘의 완벽한 호흡이 무대를 특별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린드 감독의 제안을 받고 파리에서 한 달여간 시놉시스를 구상했다는 김용걸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결국 기계도 인간에 동화되고 부드러워지는 꿈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동화’는 기계와 인간의 손발이 맞을 때 완성된다. 하지만 육중한 굴착기 네 대가 연습할 만한 너른 장소가 서울 시내엔 마땅치 않았다. 이 때문에 굴착기 파트는 평택 볼보건설기계 부지에서 별도로 연습해 왔다. 굴착기로 달걀을 옮길 수 있을 만큼 섬세한 작동 실력을 자랑하는 국내 최고 조종사 이정달(41·볼보건설기계)씨가 지도했다. 두 파트는 공연 일주일 전 강변 무대에서 조우하게 된다.
구릿빛 그을린 얼굴로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는 이씨는 “프로끼리 맞추는 것이니 큰 걱정 없다. 난생처음 서는 무대를 즐기겠다”고 말했다. 김용걸 역시 “이씨의 실력을 믿기에 굴착기들이 무용수만큼 멋진 춤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애크러배틱 퍼포먼스를 펼치는 호주 출신 케이트를 제외하고, 무용수 9명 전원(박지영·조성주·홍미선·김주희·한나희·박창모·홍우현·이수희·하준용)은 현직 국립발레단원이다. 이들은 안무가 김용걸의 요청을 받고 휴가를 반납한 채 일찌감치 남산 연습장에서 땀 흘려 왔다.
김용걸은 물론 국립발레단원들이 야외 오픈 무대에서 관객을 맞는 일은 극히 드물다. 세종문화회관·국립극장 등의 부속 야외시설에서 공연한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때도 레퍼토리는 ‘백조의 호수’ 등 클래식한 것들이었다. 자동차 소리와 아기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어우러질 여름밤 야외 무대는 이들에게 커다란 도전이다. 김용걸은 “낯선 환경이 긴장되긴 하지만, 관객이 초반부터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도시를 담아내는 거리 공연
중장비와 무용의 이채로운 만남은, 그러나 현대 공연가에선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지난해 ‘과천한마당축제’에도 프랑스 퍼포먼스팀이 내한해 이러한 만남을 선보였다. 과천시청 옆 의회 마당에서 선보인 ‘특별한 동행’이라는 작품에서 무용수는 거대한 굴착기에 담기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는 동작으로 강철과 인간 사이의 긴장감을 표현했다.
대중공간(espace public)을 무대로 삼는 거리극(le theatre de rue)의 전통이 오래된 프랑스에선 대형 기계를 활용한 퍼포먼스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기중기에 매달려 관객의 머리 위에서 공연하는 대형 공연 전문집단 ‘트랑스 엑스프레스(Transe Express)’가 대표적이다.
‘몬스터 발레’는 거리극이라기보다 이벤트성 야외극에 가깝다. 불특정한 행인이 우연한 기회에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아니라 야외 무대를 찾아가야 하기에 그렇다. 규모만 커졌을 뿐 실내 공연을 바깥에 옮겨온 형식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럼에도 도심 개발의 역사를 증언하는 한강변에서, 빌딩 숲을 배경으로 춤추는 굴착기의 몸짓은 거리 레퍼토리로서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키 높이 경쟁을 벌이는 도심의 마천루 틈에서 관객의 시선을 잡아 끌어야 하는 거리 공연은 그 자신도 키가 자라야 한다. 그래서 기중기나 굴착기가 현대 거리 공연에 자꾸 초대된다. 인간의 팔을 확장한 모습으로 도시 개발에 복무했던 중장비가, 정비된 도시 안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다시 해석되는 셈이다.
극장 밖엔 또 다른 틈새 무대
17일까지 계속되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여름 축제엔 이 밖에도 스턴트오케스트라 ‘센조’, 애크러배틱 퍼포먼스 그룹 ‘디스로케이트’,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의 무대 등 다양한 야외 공연이 포함돼 있다(자세한 행사 일정은 www.hiseoulfest.org). 축제 기간이 아니라도 점점 더 많은 공연이 야외로 나오고 있다. 도시에 문화를 입히려는 정부·지자체의 행사가 많아진 데다, 문화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하려는 기업 메세나가 활발해지면서 수준 높은 공연들이 속속 열린 공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공연들은 대개의 경우 실내 레퍼토리를 야외로 옮기는 정도지만, 장소를 바꾸면서 색다른 ‘옷’으로 갈아입기도 한다. 올 4월 서울 시내 고궁에서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 축제의 경우, 목조 건물의 울림판 효과와 고궁 내 분위기를 고려해 음향·조명 장치를 최소화했다. 이로 인해 야외 음악회는 실내 공연과는 색다른 정취를 자아냈다. 영화와 달리 작품이 올려지는 시공간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공연물의 특성 때문이다.
관객의 참여 또한 야외 공연의 매력이다. 공연기획사 아츠플레이 이성환 실장은 “관객의 참여가 훨씬 자유스러운 야외 공연에선 그런 상호교감을 살리는 레퍼토리를 많이 기획하게 된다”며 “클래식 아티스트들도 이런 분위기에 호응해 예전보다 야외 공연에 훨씬 적극적”이라고 전했다.
실속 면에서도 나쁘지 않다. 도심 공연장과 연간 올려지는 공연물의 개수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야외 공연은 아티스트들에게 틈새시장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광장은 또 하나의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