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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관광객인 줄 알면서 조준 사격했다니 …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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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금강산 관광객 고 박왕자씨의 피격 사망에 대한 정부 합동조사단의 발표는 충격적이다. 사건 현장과 유사한 고성의 해변가에서 사격 거리·방향을 추정하는 탄도실험 등을 한 결과, 박씨가 100m 이내에서 피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또 피격 당시 박씨가 정지, 혹은 천천히 걷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북한이 전한 박씨의 사망 시간인 오전 5시쯤에도 70m 거리에선 남녀의 식별이 가능했다. 북한군이 관광객인 줄 알면서도 조준 사격을 했을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사건이 터진 지 3주가 됐어도 북한 당국의 태도는 뻔뻔스럽기만 하다. 사과는 고사하고 최소한 해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금강산관광 담당부서의 담화문과 현대아산 측을 통해 밝힌 해명 내용도 의혹투성이다. 사망시간은 두 번이나 정정했다. 박씨를 처음 발견했다는 지점도 오락가락했다. 북측 주장대로 철제 펜스 넘어 800m 지점이 사실이라면, 이 거리에서 건장한 군인이 50대 여자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의문이 생긴다. 50대 여자 관광객을 무참하게 사살하고도 계속 이렇게 오불관언한다면 북한 당국은 ‘반인륜적 집단’으로 국제사회에서 낙인찍힐 것이다.

북한은 노무현·김정일 간 합의인 ‘10·4 선언’의 이행을 이명박 정부에 다그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선전 공세를 펴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이 선언을 잘 이행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다. 선언에는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분쟁을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한다’는 조항이 있다. 비무장 남측 여성의 살해가 이 조항과 부합되는 것인가.

이번 발표로 북한이 이 사건을 아무리 덮고가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됐다. 근거리에서 조준 사격을 했을 수도 있다는 정부 발표로 남측 국민의 공분은 더욱 커져 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라는 판단을 했다면 오판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는 남북관계의 정상화가 요원하다는 점을 북한은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