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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요원과 과학수사로 명성 ‘전문가 집단’신뢰받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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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22면

이창무 교수는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형사사법학을 전공했으며 올 5월 케임브리지대가 선정한 ‘2008∼2009 세계 탁월한 과학자 2000명’에 선정됐다. 저서로 『경찰행정학』 등이 있다.

한국 경찰은 민주화 이후 2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사이버범죄 수사 등 일부 분야에서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능력을 과시한다. 하지만 촛불시위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국민 신뢰를 받는다고 말할 입장까지는 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 수사기관의 교과서와 같은 존재인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들여다보게 된다. FBI 성공 비결에서 한국 경찰의 발전을 위한 교훈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한국 경찰과 FBI의 가장 큰 차이는 신뢰감에 있지 않을까. FBI는 모토인 ‘충성·용기·청렴’을 일관성 있게 지켜왔다. 한국처럼 경찰청장이 바뀔 때마다 지휘방침이 바뀌고 현판을 교체하는 수선을 떨지 않는다. FBI를 묘사하는 ‘G-Man’이라는 표현이야말로 미국인의 신뢰감을 보여 준다. ‘Government Man’의 약자인 ‘G-Man’은 말 그대로 정부 기관원을 의미한다. 특히 시·군 경찰과 같은 지방 기관원이 아닌 연방정부 요원의 뜻으로 쓰인다. ‘G-Man’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지방 경찰의 무능과 부패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19년 금주법의 발효로 알 카포네 같은 조직폭력배의 전성기가 열렸다. 분권화된 자치경찰제를 실시하는 미국에서 상당수의 지방 경찰은 당시 경찰관직을 사고파는 일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전문화되고 기강이 잡힌 경찰이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는 지방 경찰 조직을 돈과 폭력, 정치권력의 힘으로 장악했다. 조직폭력배를 수사하고 검거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1908년 창설돼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FBI가 성가를 높인 배경에는 바로 무능하고 부패한 지방 경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미국 국민의 실망과 불신은 극도로 치달았다. FBI 요원들은 지방 경찰과 확연히 달랐다. 잘 훈련됐으며, 매수와 압력에 흔들리지 않았다. 수사 목표가 정해지면 반드시 완수했다. 이러한 FBI 요원의 이미지는 미 국민에게 강한 신뢰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강직하고 철저한 G-Man의 이미지야말로 촛불시위 진압 등으로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경찰에 절실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FBI에 대한 신뢰는 초기에 우수한 요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덕택이다. 1930년대 초에는 변호사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 FBI 요원들의 자질 향상을 꾀했다.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구직난이 심했던 탓도 있지만, 변호사·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을 요원으로 선발한 것은 파격적이고 획기적이었다. 미 국민이 FBI 요원들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또 FBI아카데미를 만들어 요원 교육·훈련을 강화함으로써 전문성을 높였다. 첨단과학수사연구소 운영과 행동과학부(BSU)의 범죄 프로파일링 기법 활용 역시 FBI의 성가를 높이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직무에 충실한 전문가 집단을 육성하는 게 말로만 될 리 없다. 직원 3만여 명인 FBI의 일 년 예산은 6조4000억원을 넘는다. 이에 비해 한국 경찰 숫자는 전·의경을 포함해 15만 명이지만 예산은 6조7000억원밖에 안 된다. 양국의 경제력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경찰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충분한 재정 지원 없이 FBI 같은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국 경찰은 수사권도 없다. 수사권 없는 FBI가 제대로 된 수사를 할 리 없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형적 수사제도의 족쇄와 부족한 예산의 한계를 무시하고 “왜 FBI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질타한다면, 잔디구장 하나 없는 나라에서 월드컵 축구 우승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FBI의 홍보 전략도 주목할 만하다.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대형 사건, 이를테면 대서양 무착륙 단독 횡단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의 아들 유괴 사건에 총력을 집중해 유괴범을 검거했다. 또 은행을 턴 뒤 주(州) 경계에 대기시켜 놓은 도난 차량으로 갈아타고 다른 주로 도망가는 수법으로, 11번이나 은행을 털었던 존 딜린저 일당을 수년간 추적한 끝에 잡아내 수사 능력을 과시했다. 지방 경찰은 조롱거리가 된 반면 FBI는 해결하지 못할 범죄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 준 것이다.
FBI의 역사가 보여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정치적 중립성이다. 에드거 후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하지만 그는 무려 48년 동안 FBI를 장악하면서 외풍을 막아 내고 절충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 한국 사회에선 경찰·검찰 가릴 것 없이 정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에서도 정권과 상관없이 경찰 조직을 일관성 있게 이끌 수 있는 인물이 나와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국민 만을 바라볼 때 국민도 경찰을 신뢰하게 된다. 공권력은 정치논리가 아니라 법과 질서의 논리에 따라 작동할 수 있을 때 존중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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