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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나눈 깨달음의 이야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2호 05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쑥부쟁이/토종의 선명한 빛깔로 여름 산비탈에서 빛나는 패랭이/가장 먼저 봄 소식을 전해 주는 화엄제비꽃

오경아(41)씨는 16년 동안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써 온 방송작가다. 힘든 나날에 지친 어느 날, 일산에 작은 마당 딸린 집을 얻으면서 그의 삶은 변했다. 흙에 엎드려 꽃과 풀과 나무를 심을 때 밀려오는 평화와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음이 흔들린 오씨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원사로 일하며 가든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과정을 시작했다. 그는 크리(Cree) 인디언 부족의 예언을 떠올렸다. “마지막 나무가 잘려 나가고, 마지막 강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혔을 때, 그제야 우리는 돈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꿈꾸는 정원사의 사계 담은 『소박한 정원』

『소박한 정원』(디자인하우스 펴냄)은 오씨가 지난 3년 동안 정원사로서 겪은 체험을 영국왕립식물원 ‘큐 가든(Kew Garden)’에서 한 현장실습을 뼈대로 들려준다. 꽃과 나무를 잘 키우는 요령만 쏙 뽑아 낸 가이드북은 아니다. 식물학적 지식보다는 “흙과 식물을 통해 선량한 삶을 배운” 영국 정원사의 정신이 듬뿍 배어 있다.

눈 속에서도 핀다 하여 얼음새꽃이란 이름을 얻은 복수초

“나무처럼 고요히 살고 싶다 하면, 그건 오해다. 1년 내내 나무도 사느라 힘들다. 타들어 가는 가뭄에,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에, 생명에 치명적인 거친 바람을 이겨 내며 산다. 껍질을 파고드는 곤충과 잎을 갉아먹는 벌레도 참고 이겨 내면서…. 그리고 봄이 오면 꽃망울을 피우고 열매 맺어 열심히 후손을 퍼뜨린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한순간도 고요치 않다.”

오씨는 정원에서 보낸 사계절 속에서 인생의 사계를 읽었다.
“정원은 시간의 예술이다. 가든 디자인 공부를 시작할 때 맨 처음 교수가 던진 질문이 바로 시간과 정원이었다. 정원엔 시간이 흐르고 시간은 무엇을 만들어 낸다. 봄에 싹을 틔운 잎이 무성한 나뭇잎이 되어 여름을 덮고, 가을이 되면 그 잎을 다시 노랗게 물들인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다시 모든 것을 없음으로 돌려보낸다.”

장미 가지치기를 하고 나서 그는 내면을 다스리는 법에 빗대 썼다.
“가지치기는 생가지를 쳐내는 일이므로 식물에겐 고통스럽고 아픈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매년 더 튼튼하고 신선한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낼 수 있으며, 식물 자체도 더욱 튼튼해진다. 욕심은 쳐내고 꿈은 이듬해 잘 자라도록 우리 마음에도 정기적인 가지치기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오씨는 영국으로 떠나기 전 도시생활자로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만성 두통과 잦은 배앓이로 고생했다. 그저 운동 부족이려니 지레짐작했던 그는 정원 일을 시작한 뒤로 편두통이 사라지고 몸도 활력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왜 변했을까. 스스로 내린 진단은 이렇다. “내 마음에 생긴 빈자리, 여유였다. ‘모든 게 잘될 거야’라고 믿고 위로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삶은 똑같은데 아니 더 빠듯하게 조여 오는데도 세상이 참 많이 순하고 평안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은 고돼도 마음이 평안한 이 상태를 즐기며 그는 식물이 준 지혜를 깨닫는다. “정원 일은 요즘 세상과는 반대로 가는 일이다. 빠르고 간단하게가 아니라 느리게 천천히 가는 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마지막 추위가 다 지나갔다고 일기예보가 장담을 해도 한번 짚어 가는 답답한 느림, 누렇게 빛바래 가는 잎사귀가 보기 싫어도 식물 스스로가 이제는 됐다고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무던함, 잘라 놓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후 가위를 드는 신중함, 그게 정원의 일이다. 그 훈련이 정원사의 공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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