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경이 만난 사람 - 곽승준] ① "MB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2008.07.18 11:38

업데이트 2008.07.18 14:21

월간중앙 “MB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지난 6월20일, 쇠고기 파동 속에서 청와대를 떠난 곽승준(48)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이렇게 말했다.

“시작이 울퉁불퉁하지만, 전체 마라톤 코스에서 1km 정도 뛰다 장애물을 만나 운동화가 벗겨진 상황이다. 격려해주면 다시 잘 뛸 수 있다.”

지난 5월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첫 촛불집회가 시작된 뒤 이명박 대통령은 코너에 몰려 있다. 대통령이 쓸 수 있는 각종 특단의 대응조치를 잇달아 내놓았지만 국민의 마음을 돌려 놓지 못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도 안 된 시점인 지난 5월22일과 6월19일, 두 차례에 걸쳐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하는 이례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조직개편도 잇따랐다. 지난 6월20일에는 청와대 대통령실장을 비롯해 수석들이 전원 사표를 냈고, 6월24일에는 비서실 조직개편과 함께 새로운 진용이 구성됐다.

6월10일 제출한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일괄사표는 근 한 달 만인 지난 7월7일 3부 장관의 교체로 최종 결정났다. 하지만 경제팀 수장인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구제하고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을 교체한 인사가 ‘대리경질’이라는 야당의 공격을 받으며 개편의 ‘약발’도 약화했다.

게다가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까지 겹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왜 이런 상황에까지 몰린 것일까? 보좌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좌 우익, 우 승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이번 청와대 개편으로 물러난 곽승준 전 국정기획수석. 지난 7월11일, 고려대 곽 전 수석의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 인터뷰 제1막
“청와대 124일, 무슨 일이 있었나?”

지난 6월24일 이뤄진 청와대 비서진 개편을 보면 약체였던 홍보·정무 분야가 강화되고 홍보기획수석 산하에는 국민소통비서관까지 생겼다. 42개 비서관 수는 변함없지만 쇠고기 파문 과정에서 약점을 노출했거나 수석 간 분란의 원인을 제공했던 부분에 칼을 댄 것.

이런 개편을 놓고 외부에서는 ‘이 대통령 취임 4개월 만의 반성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번 청와대 개편으로 대통령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측근도 모두 떠났다.
그 대표주자인 곽 전 수석은 “이 대통령은 누구에게 의존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막판까지 잔류할 것이라는 항간의 예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을 오랜 기간 측근으로 보좌해온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게 내 인생에서도 중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청와대에) 있는 것보다 같이 나가는 것이 대통령 입장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달리 내각의 개편은 ‘찔끔 개편’이었다. 대대적 개편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유임되고 최중경 제1차관이 경질된 것에 대해 곽 전 수석은 “내가 이렇다 저렇다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나는 나와야 한다고 내 스스로 생각해 결정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곽 전 수석에게 최근 벌어진 ‘청와대 사태’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청와대 조직체계 구성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 문제에서 보듯 특정인에게 권한이 집중된 반면 홍보나 정무 기능은 위축되는 조직이었던 것 같은데….

“조직으로 보면, 바로 전에는 청와대에 실장이 네 명(비서실장·정책실장·외교안보실장·경호실장)이었다가 비서실장 한 명(대통령실장)으로 줄어들었다. 굉장히 일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수석급도 홍보수석을 비롯해 서너 자리가 줄었다.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조직으로 정비가 안 됐다. 사람들이 섞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3년 동안 대선을 치르고 인수위 활동까지 함께 하다 온 사람과, 바로 들어온 사람들 간에 속도와 인지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융화하고 내부 소통을 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쇠고기정국을 맞은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일할 만한 상황에서 나오게 됐다. 류우익 실장도 딱 자신의 역할을 찾았을 때 그렇게 돼서 아쉬울 것이다.”

- 초기 청와대 비서팀 구성이 효율적이지 않았다는 말인가?

“청와대 자체를 작은 조직으로 만드는 것은 괜찮았는데, 홍보수석 등 필요한 직제가 몇 가지 부족했다고 본다.”

- 쇠고기정국에 대한 초기 대응은 어떠했다고 보나?

“개인적으로는 초기 대응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쇠고기라는 것이 일종의 상품 문제인데, 이렇게 확대된 것은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안전하다는 것과 안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소통이 부족했다. 특히 인터넷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것 같다. 대선 막바지 즈음에는 인터넷을 통한 BBK 문제의 확산을 경계했다. 그룹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팬클럽 간에 벌인, 온라인에서 댓글을 점령하는 사태까지 주시할 정도로 인터넷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하지만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그 기능을 복원하지 못한 과도기 상태에서 쇠고기 사태를 맞은 것 같다. 소통 정책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쇠고기 사태 대응 방안에서 청와대 내 이견은 없었을까? 곽 전 수석은 “이견은 있었지만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본다”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정국을 풀어나가는 데 사람마다 다른 방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며 여운을 남겼다.

- 본인은 어떤 생각이었나?

“잘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막 뛰어가다 발에 걸려 넘어져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다. 후속 협상을 하든, 재협상을 하든 대응 타이밍이 적절했으면 빨리 털어버리고 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물론 나처럼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담당하는 외교통상부나 농수산식품부 측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쇠고기정국, “초기 대응 적절치 못했다”

- 곽 전 수석은 실세로 알려져 있다. 쇠고기정국 대응 방안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나?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와 달리 10분의 1로 줄었다. 선거 때는 정책기획단장을 맡으면서 정책의 성격에 따라 속도를 조절했고, 인수위에서도 기획조정분과 인수위원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조율을 맡았다. 하지만 청와대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부처·당 등 삼각관계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공공부문 개혁, 규제완화, 지방발전 등 국정기획수석실의 고유 업무에만 집중해 우리 정권의 성적표를 대비하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로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많이 고심했다.”

- 누가 촛불시위를 이끌고 있다고 보나?

“처음 시작은 학생과 주부들이었는데, 점차 이 정국을 악용하는 세력이 나왔다고 본다.”

이어 곽 전 수석은 이 두 그룹을 분리해 대응하는 것이 어렵다고 밝혔다.

“호미로 막을 상황을 가래로도 막기 어렵게 된 것이다. 쇠고기정국 때문에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개혁이 쇠퇴하는 것이 안타깝다. 예를 들어 공공부문 임직원이나 부처가 갖고 있던 많은 파이를 일반 국민에게 돌려주는 공공부문 개혁만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청와대가 어려운 상황이 되자 벌써 로비를 하고, 정치권도 이제는 반대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탄력을 받았는데, 쇠고기정국 속에서 그런 전세를 구축해버려 아쉽다.”

“공공부문 등 모든 개혁 쇠퇴해…”

- 쇠고기정국이 시작된 이후 대통령은 어떤 반응이었나?

“대통령도 쇠고기정국 이후 말을 아꼈다. 그래도 개혁은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상황이 어려워 속도를 조정하는 것이지 공기업 선진화, 교육개혁 등 개혁과제는 꼭 이루겠다고 했다.”

곽 전 수석이 추진하던 공공부문 개혁의 핵심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공공기관을 통합하고 민영화하는 일이다. 가장 상징적이고 시급한 것이 주택공사와 토지공사, 신용보증기금과 기술신용보증기금의 통합과 한전·KPS·산업은행 민영화다.

이 개혁안은 10년 전부터 실행의 공감대와 필요성이 형성됐으나 항상 정치권의 로비에 부닥쳐 좌절됐다. 현재 한 해 예산의 12% 정도나 차지하는 약 24조 원에 달하는 돈이 이런 공공기관 지원금으로 집행되는 실정이고 보면 공공부문 개혁은 서민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다.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대단히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정작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는 그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졌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인수위 때 193개 최종 국정과제를 만들었다. 선거와 인수위 때까지는 우리가 만들면 굳어졌는데, 청와대에 와서는 정부와 당 등 굉장히 많은 정책 파트너가 생겼다. 생각이 조금씩 달랐고…. 그런 상황이 있어서 인수위 때보다 추진력이 좀 약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국무총리실에서 193개를 관리하면서 100일 과제를 달성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보좌 강도에 차이가 있었을 것 같은데….

“인수위 때 일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인수위 때는 의원들이 인수위에 들어와 있어서 인수위를 통해 결정할 수 있었다. 청와대에서는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 그와 관련해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는 있었나?

“인수위 때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5개년 플랜을 잘 세우자고 말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대통령은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고 있다. 국민이 나를 뽑아준 이유가 이 안 좋은 경제상황에서도 국민을 먹고 살게 해주고 한국을 업그레이드시키자고 한 것 아니냐? 남들이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고 하는데,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했다. 올해와 내년 잠재성장력을 못 높여주면 안 되고, 국민이 빠른 가시적 성과를 원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느릴 수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고 뛸 태세를 갖춘 것이다. 히딩크도 한국말 중 ‘빨리빨리’가 제일 좋다고 하지 않았나.”(웃음)

“자만 아닌 의욕적 시작이었다”

- 그 ‘빨리빨리’가 노무현 정권과의 차별화를 너무 의식한 데서 출발한 것은 아닌가?

“차별화하려고 하기보다 잘못된 경제정책을 바로잡는 과정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좀 더 국민에게 이해시켰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 혹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권의 낮은 지지율 때문에 자만했던 것 아닐까?

“자만했다기보다 초창기 지지율이 높아 굉장히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글 임도경 인터뷰 전문기자

1960년 1월26일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 학사·석사.
경희대 언론학 박사.

<뉴스메이커> 기획위원 및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우먼타임스> 주필(이사대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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