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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터진 1·2차 때보다 여건 나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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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차 오일쇼크도 산유국 간 전쟁으로 촉발됐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가격을 올린 데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중동 정세가 불안했다. 이란이 78년 말 석유 수출을 전면 중단하면서 단번에 세계 석유시장에는 하루 560만 배럴의 공급 차질이 빚어졌다. 78년 말 12.7달러였던 유가는 2년여 동안 최고 42달러까지 올랐다. 한국은 국내 정정 불안까지 겹치면서 79년 6.8%였던 성장률이 80년 -1.5%로 추락했다.

1, 2차 때는 단기간에 유가가 급등해 충격은 컸지만 상대적으로 여파는 길지 않았다. 유가 급등의 원인인 중동의 정치적 불안과 산유국의 감산 문제만 해결하면 수습이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 2차 오일쇼크 때는 유가 상승의 70%가 공급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은 거꾸로 유가 상승 요인의 70%가 수요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1, 2차 쇼크를 거치면서 대체에너지 개발이 늘어나고 에너지 효율도 높아져 위기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며 “그러나 금융시장 불안과 원자재 투기 세력 등 주변 여건은 당시보다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응도 1, 2차 때가 지금보다는 쉬웠다. 단기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면 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민간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여서 통제도 쉬웠다. 1차 쇼크 때인 74년 1월 정부는 ‘긴급조치 3호’를 발표했다. 사치품·유흥업 단속이 핵심이었다.

2차 쇼크 때인 79년 정부는 연간 유류 사용량을 5% 줄이는 에너지 절약대책을 내놓았다. 주유소 영업시간을 오전 6시~오후 10시로 제한하고, 공공기관의 전구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내용이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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