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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간군인들>6.끝.아물지 않는 후유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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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5.18이후 음지(陰地)에서 살아야 했습니다.사람들은 우리를「학살자」「전두환 앞잡이」라고 부릅니다.시위대를 무차별 진압했다는 면에서 분명「가해자」겠지요.하지만 돌아온 건 상처와 멸시뿐이었습니다.우리가 과연 진정한 가해자입니까.』 「광주로 갔던 군인들」의 공통된 얘기다.이들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갖가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상급자였던 정치군인들이 5.18을발판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반면 이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채 전역했다.사회에서는 공수부대 출신이라는 이유때문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이를 이겨내지 못해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도 적지않다.
3공수 11대대 중사였던 丁모(39.서울동대문구장안동)씨.
그는 5월23일 광주교도소앞에서 경계근무중 교도소로 다가오던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이어 숨진 사람들을 교도대 부근 야산에 암매장했다.丁씨는 전역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매일 술로상처를 달래다 정신질환까지 겹쳐 지난달초 가출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丁씨의 아버지(68)는『아들은 매일 집앞 가게에서 싸구려 양주 한병씩을 사와 먹었다.술만 먹으면 「내가 시민을 죽인 살인자」라며 한탄했다.한 직장에 오래 있지도 못해 일정한 직업없이전전했다』며『아들의 피해는 누가 보상하느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5.18 문제가 나올 때마다 安의선(39)이라는 군대 후배가 생각납니다.그는 미국에서 생활하다「병역의 의무를 다하겠다」며 79년 귀국,공수부대에 자진입대했다가 광주로 가게 됐지요.그러다 5월23일 금남로 근처에서 오른쪽 대퇴부에 총을맞고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그는 한동안「전두환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며 한탄하곤했습니다.최근 미국으로 돌아가 주위와 인연을 끊은 채 살고있습니다.』〈11공수 63대대 李모(40.당시중사)씨〉 『광주진압이 끝나고 바로 제대,고향 광주에 갔습니다.1년동안은 쓰라린 기억 때문에 술로 보냈습니다.취직을 하려고했지만 공수부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광주에서는 일자리 잡기가 어려웠습니다.할 수 없이 자영업을 했지만 주위에서「저 ×이공수부대였지」라고 손짓해 그만두고 83년 서울로 왔습니다.당시우리 부대엔 전라도 출신이 절반 정도였는 데 지역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부랑자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7공수 33대대 李모(40.중사)씨〉 부상자들은 국난극복훈장을 단채 내동댕이쳐졌다.일부는 아직도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24일 오후 2시쯤 효천마을에서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아직도 다리에서 농이 나와 고통스럽습니다.제대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해 행복했던 가정생활이 엉망이 됐습니다.부하중에는 고함소리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폭도들이 몰려온다」는환청현상을 일으키는 등 심한 불안증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11공수 63대대 金모(48.대위)씨〉 88년 국회 광주청문회등을 통해 양심선언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동료들의 협박 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89년 1월 청문회에서 양심선언한 뒤 같은 동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전화를 걸고 집에도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한 때는 협박때문에 자살도 시도했습니다.뒤를 이어 양심선언하겠다는동기생이 있었지만 제가 협박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습니다.』〈7공수 33대대 최영신(崔永信.41.중사)씨〉 崔씨는『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정확한 증언이 나오려면 당시 광주에 있었던 또 다른 피해자인 공수부대원들에 대한 생활보장.신변보호등 피해보상책이 제도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로 간 군인들」이 연재되는 동안 독자뿐만 아니라 당시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원들부터 수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증언자 상당수는『네가 그런 소리했느냐』『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한다.이런 위압적 분위기에서도『역사의 편린(片鱗)이라도 되고싶다』며 증언에 협조한「광주로 간 군인」들의용기는 박수받을 만하다.이들의 입장을 고려,익명 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점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편집자 註〉 사회부특별취재반=김태진. 강홍준.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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