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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간군인들>4.충정훈련과 과잉진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5.18 기간중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현지 투입직전 부대원들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해도 좋다』고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수부대원이 받은 충정훈련(시위진압훈련)과정에서 곤봉으로 시위대의 머리를 집중 가격하도록 교육하는 등 혹독한 진압훈련이 실시됐던 것으로 드러났다.이와 함께 진압초기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시민들이 공수부대원들이 휘두른 진압봉에 맞아사망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충정훈련을 받고 초기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7공수 35대대 소속 趙모(39.당시 하사),7공수 33대대 崔모(41.중사).
朴모(40.중사),11공수 金모(40.대위),3공수 16중대 李모(40.중사),20사단 60연대 鄭모(38.상 병)씨 등의증언이다.공수부대원들은 80년 초부터 혹독한 충정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 사이에선 시위대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났다.
『외출.외박없이 겨울부터 시작된 「충정훈련」에 대한 부대원의반발이 과잉진압을 불렀습니다.특히 「철없는 대학생들 때문에 우리만 고생한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갔지요.』〈李씨〉 『충정훈련 도중 진압봉으로 머리통을 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위에서 명령내리는 대로 훈련에 열중했습니다.연일 계속되는 훈련에염증을 느낀 나머지 하루 속히 「실전」에 투입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朴씨〉 『무엇보다 영외거주자인 고참 하사관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그 불만이 밑으로 전달됐습니다.나가면데모하는 대학생놈들 가만두지 않겠다는 적개심밖에 없었습니다.』〈趙씨〉 이런 상태에서 「강력진압」을 강조하는 정신교육이 잇따랐다. 『광주사태 며칠 전부터 충정훈련을 받을 때마다 대대장.
중대장이 정신교육을 통해 「광주에서 소수의 빨갱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시위대는 모두 빨갱이니 때려 잡아야 한다」며 과잉진압을 유도했습니다.』〈李씨〉 이윽고 계엄확대 조치에 따라 7공수는 5월18일 새벽 조선대와 전남대에 배치됐다.캠퍼스에는 학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충정훈련 때 익힌대로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검거했다.공수부대의 「구타 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광주시내에서 시위가 그치지 않자 이날 오전10시 조선대에 주둔하던7공수 35대대는 시내투입을 앞두고 지역대장(소 령)들이 부대원들에게 「훈화」를 했다.『금남로 일원에 데모가 심하다.진압때폭도들이 말을 안들을 경우 을 빼내도 좋다.반항하는 ×은 끝까지 추적해 본때를 보여줘라.』 지휘관들의 과잉진압 지시는 같은날 광주일원에 배치된 3공수와 11공수에서도 발견된다.
『투입직후 중령 한 명이 마이크를 들고 경상도 사투리로 「죽을 만큼 패라」고 지시했습니다.나중에 그 중령의 말씨가 문제돼「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다 죽이러 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게 됐습니다.』〈金씨〉 같은 날 오전 등교하는 전남대생과 7공수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다.공수부대원 몇 명이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하자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렸다.폭력으로 일관된 진압은 광주시내에서도벌어졌다.
『금남로였습니다.시위대가 보여 착검을 하고 진압대형으로 나갔습니다.시위대가 겁을 먹고 부근 빌딩으로 도피했습니다.빌딩 셔터를 발로 차니 주인이 문을 열어주더군요.고개를 숙이고 나오는시위대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피가 솟구쳤습니다.』〈李씨〉 초기 과잉진압으로 시위대의 피해가 속출했다.
『광주시내에서 붙잡은 시위대를 태운 보안대소속 버스(당시 영구차라고 불렸다)가 커튼으로 창문을 가린채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에 속속 도착했습니다.버스에서 내린 시위대중 90% 이상이 뒷머리를 곤봉으로 맞아 머리가 터진 상태였어요 .어림잡아 10여명은 얼마후 숨졌습니다.』〈崔씨〉 검찰은 18일 하룻동안시위진압 과정에서 金경철(28)씨 한 명만이 머리 타박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지금은광주에 갔었다는 이유로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鄭씨〉 특별취재반=김태진.강홍준. 김현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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