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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검사인데…” 약점 파고드는 연기 달인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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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 22면

사칭 사기범은 전문 용어를 구사하고 범행 시나리오를 정교하게 짠다. 사진은 사기범을 다룬 영화 범죄의 재구성의 한 장면.

○○○호 검사실. 한 젊은 검사가 수사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 뒤 빼꼼히 연다.

사칭(詐稱) 사기의 세계

“누구신지….”
“○○일보 기잡니다.”
“아, 예.”

검사실에 들어온 기자는 검사와 차를 마신다. 검찰 안팎의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그 후 자주 검사실에 들르던 기자는 어느 날 “긴한 부탁이 있다”고 말한다.

“갑자기 돈이 필요한데, 100만원만 빌려 주시겠습니까. 며칠 뒤 갚겠습니다.”
돈을 받은 기자는 검찰청에 발길을 끊는다. 사이비 기자였던 것. 이 이야기의 피해자는 김주덕 변호사. 20여 년 전, 초임 검사 때 겪은 일이다. 그가 사기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검사까지 사기범에게 당하는 상황에서 일반인은 말할 나위가 없다.
‘청와대 특별경호실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올 1월 남편이 금융 다단계 사기 혐의로 구속된 정모(47)씨 앞에 한모(37)씨가 나타났다.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자신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단장을 지냈고, 지금은 대통령 특별경호실장으로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남편의 석방을 위해 로비를 해줄 테니 자금을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명박 대통령 명의의 감사장과 대통령 표창을 내밀었다. 잠시 후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예. 어르신. 접니다.”
전화를 끊은 한씨는 “방금 이 대통령과 통화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며칠 뒤 만난 그는 정씨 면전에서 ‘형님’과 통화를 했다. 이번엔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라고 했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정씨는 한씨에게 로비 자금을 주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기당한 사실을 안 정씨의 신고로 한씨가 구속됐지만 29차례에 걸쳐 챙긴 돈은 모두 3억5300만원. 경찰 관계자는 “한씨의 통화 내역을 조회한 결과 청와대로 전화를 건 흔적이 없었다”면서 “혼자 통화하는 척 연기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6일에는 청와대 특별보좌관을 사칭하며 5000만원을 뜯어낸 혐의로 김모(61·무직)씨가 구속됐다. 김씨가 인쇄물 소개업자인 B씨에게 접근한 것은 2005년 4월. 김씨는 “미국 CIA 직원이자 청와대 특별보좌관”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다른 공범 2명이 각각 생명공학 박사와 특별보좌관 비서 역할을 맡아 B씨를 그물망으로 몰아갔다. 봉황 모양의 금장 문양이 찍힌 가짜 특별보좌관 신분증도 제시했다. 김씨는 “전직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 5조원을 국내에 들여오는 데 5000만원이 필요하다. 빌려 주면 그 10배를 주겠다”고 유혹했다.

이처럼 ‘청와대’가 사칭 사기에 애용되는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극성을 부렸던 청와대 사칭 사기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며 “우리 정치문화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와 검찰·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에 국한되던 사칭 대상이 사회 변화와 함께 기업인·연예인 등 다양한 직종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게 김 변호사의 분석이다. 실제 올 들어 검거된 사기범이 사칭한 직업을 보면 ^대학교수 ^펀드매니저 ^시민단체 운동가 ^시장 ^환경미화원 등으로 다양하다.

사칭 사기범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김 변호사는 “사기꾼은 누가 묻지도 않는데 자신에 관해 떠벌린다”면서 “진짜 청와대에 있거나 검사라면 오히려 처신을 조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유난히 선량한 척하며 약속도 칼같이 지키는 등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데 주력한다.

사칭한 직업과 관련된 전문용어도 많이 사용한다. 관련 분야를 깊이 연구하고 직업 특유의 말투나 제스처를 연습해 목사보다 더 목사 같고, 검사보다 더 검사 같다.

이들은 사칭하는 직업을 평소 동경해 온 경우가 많다. 김 변호사는 “검사나 사법연수원생을 사칭하는 사기꾼은 대개 사법시험 공부를 했거나 수사나 재판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서 “자신이 진짜 검사나 사법연수원생인 양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고 했다.
사칭 사기범들은 정교한 범행 시나리오를 짜는 등 철저히 준비한다. 재벌 회장의 아들이라고 속여 여성들에게서 거액을 가로챈 20대 남성은 외제 차를 빌려 몰고 다녔다.

그는 여성과 함께 차를 타고 진짜 회장 집 앞에서 내린 다음 초인종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공범인 운전기사가 곧바로 여성을 태우고 떠나면 ‘재벌 2세의 귀가’가 완성된다. 일부 사기범은 단골로 다니는 호텔 파킹 맨에게 팁을 많이 집어준다. 재벌급 대우를 받기 위해서다.

과거 사기범 중엔 30대 후반부터 40대 사이 연령대에 깔끔하고 세련된 생김새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엔 어수룩하게 생긴 부류도 적지 않다. 자기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에게 경계심을 갖는 심리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어수룩하게 생겨도 돈과 지위·능력이 있으면 달라지는 게 사회적 인식”이라며 “작은 사기를 치려다 큰 사기에 당하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사칭 사기의 폐해가 큰 반면 사기범을 처벌하기란 쉽지 않다. 사기범들은 대개 범행 후 도피한 뒤 공소시효(7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조사를 받더라도 무조건 부인한다. 사기범을 믿은 피해자가 아무런 증거자료도 없는 데 반해 사기범은 처음부터 빠져나갈 자료를 많이 준비해 둔다.

검사나 공무원을 사칭해 결혼했다면 어떤 처벌을 받을까. 공무원 자격 사칭죄는 공무원 자격을 사칭해 그 직권을 행사해야 성립한다. 그런데 결혼은 직권 행사에 해당하지 않아 이 조항으론 처벌할 수 없다. 재물을 가로채지 않았다면 사기죄를 물을 수도 없다. 결국 경범죄 정도에 그치게 된다.

김 변호사는 “허황된 욕심을 부리다 사기꾼이 던진 미끼를 물게 된다는 점에서 사기의 90%는 피해자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세상에 절대 공짜가 없고 일확천금의 꿈도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남에게 이익을 주려는 사람은 없는 만큼 이유 없이 좋은 제안을 해오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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