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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장면' 현명하게 피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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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오페라 제작자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20여 년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무대감독을 역임한, 현대 오페라 역사의 주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정신의학의 역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섯 살의 어린 환자 ‘꼬마 한스’였다. 꼬마 한스는 말[馬]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외출조차 기피했던, 소위 ‘말 공포증’ 환자였다. 정신분석학자였던 한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에 대해 프로이트에게 조언을 구했다. 프로이트는 한스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이란 개념을 세우는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된다.

원초적 장면이란 어린아이가 목격한 부모의 성행위를 말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상당수가 이러한 원초적 장면을 경험했던 것을 보고 그 중요성을 제기했다.

실제로 아이가 부모의 성행위를 목격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아직 성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미성년 아동이 부모의 성행위를 보면 엉뚱한 해석과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아이의 눈에 성행위는 남성이 공격적인 가해자로, 여성이 수동적인 피해자로 비칠 수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공격받는다는 폭력성이나 혐오감은 아이에게 성에 대한 오해와 성 기피를 일으킬 수 있다.

필자는 성행위 때 행여 아이가 방으로 불쑥 들어올까 두려워 성 흥분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부부를 자주 본다. 심지어 배우자와 성행위를 하는 것이 부모로서 아이를 등한시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에 빠진 성 기피증 부부들도 있다. 어떤 남편은 잠든 아이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위에서 성행위를 하려 든다. 하지만 이 또한 원초적 장면에 노출될 위험성이 커 아이에게 좋지 않고, 부부에게도 성 흥분의 방해요소가 될 뿐이다.

이런 사례들은 자녀가 부부관계에 이미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뜻한다. 소중한 내 아이겠지만 부모·자녀 사이에 적절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더 현명하며, 가족 구성원 간의 건강한 ‘분리’는 아이의 정서 발달에도 중요하다. 그 경계선이 모호하고 서로 뒤엉키면 아이의 독립성은 훼손되고, 지나친 의존성을 초래할 수 있다.

부부의 성생활은 아이 때문에 피할 일이 아니다. 이보다는 부부와 아이 모두를 보호할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어린아이라 꼭 함께 자야 한다면 성행위 때만큼은 잠시 아이를 침실 밖으로 옮겨야 한다. 아이가 밤중에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올 나이라면 성행위 중에는 과감히 방문을 잠그는 게 올바른 부모의 모습이다.

“엄마·아빠, 방문 잠그고 뭐했어?”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나쁜 짓을 한 것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아이에게 엄마·아빠 사이엔 아름다운 비밀이 있고 그 사랑의 결실로 자신이 태어났으며, 여전히 엄마·아빠는 사랑하고 있다고 은근히 암시를 주는 건 아이에게 성의 고귀함을 가르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이는 암시로 끝나야지 직접적인 성행위의 노출은 부부와 자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강동우·백혜경 성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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