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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밖에선 스포츠광이었던 세계적 음악가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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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26면

지휘대에서 절대 카리스마를 행사한 카라얀은 제트기ㆍ스포츠카ㆍ오토바이 운전을 즐긴 스피드 스포츠광이었다. 토스카니니의 공연을 보기 위해 322㎞(200마일) 넘는 거리를 오토바이로 달리기도 했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이 모델 출신의 엘리에트 무레와 1958년 세 번째로 결혼하자 “어울리지 않는다”는 여론이 일었다. 가장 큰 이유는 둘의 취미와 관심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대중은 스물한 살짜리 모델이 음악의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물론 그 어떤 스포츠도 즐기지 않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무대 밖의 카라얀은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스피드에 몸을 맡기고, 웬만한 스포츠에 보통 이상의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다. 토스카니니의 지휘를 보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322㎞(200마일)가 넘는 길을 달린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스물한 살에 할리 데이비슨을 사들인 카라얀은 60세 생일 선물 중 250㏄짜리 야마하 모터바이크를 가장 반가워했다고 한다. 스포츠카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페라리ㆍ포르셰는 물론 롤스로이스와 미니, 메르세데스 등이 지휘자의 손에 들어왔다. 스키ㆍ승마 또한 수준급이었고 요가까지 했다. 자신과 부인, 두 딸의 이름 첫 글자를 딴 요트 ‘헬리사라(Helisara)’를 여섯 대 보유하고 있었다.

탁구를 즐기는 젊은 날의 정경화(왼쪽)ㆍ명훈 남매.

문제는 이 스포츠 종목들이 지나치게 귀족적이라는 데 있었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와 음악의 작은 부분까지 철두철미하게 조직하는 제왕적 지휘자였다. 고급스러운 스포츠는 그의 독선적인 이미지를 굳혔다. 카라얀의 전기를 쓴 리처드 오스본은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던 카라얀은 ‘젯셋(jetset)족’, 즉 ‘제트 여객기로 세계를 돌아다니는 상류 계급’이라는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을 참아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음악가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은 연주만큼이나 청중의 관심을 끈다. 좋아하는 스포츠와 연주 스타일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36)는 2006년 내한 때 갑자기 일정을 바꿔 동대문 시장에 들렀다. 탁구 라켓을 사기 위해서였다. 단 며칠 머무르는 동안에도 ‘근질거리는’ 몸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루간스키의 ‘탁구 사랑’은 강철 타건으로 피아노를 내려찍는 연주 스타일과 묘한 조화를 이뤘다.

폴란드 크라츠코프 축구팀 유니폼을 입은 나이젤 케네디.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는 축구 팬이었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한 후 “혼란스럽고 기괴하다”는 이유로 스탈린의 박해를 받았던 그는 축구를 일종의 도피처로 삼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니트’ 축구 클럽(한국의 이호와 김동진이 이 팀에서 뛴다) 팬이었던 그는 단지 경기를 보기 위해 러시아를 횡단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 자신의 발레 ‘황금시대’에도 축구를 등장시켰다. 자국 축구 선수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만국 박람회에 나가 계급투쟁의 우수성을 선전한다는 내용으로 지위 복권을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휘된 작곡가의 융통성에도 스포츠가 있었다.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축구 사랑도 남다르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스페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응원단에서 자주 발견된다. 런던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며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분더킨트’ 다니엘 하딩(33)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광팬이다. 한국 음악계의 1세대로 꼽히는 임원식(1919~2002) 선생 또한 소문난 스포츠광으로 시간만 나면 축구장과 야구장에 드나들었다. 마지막으로 입원했을 때도 병실 TV에서는 스포츠 중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음악인의 축구 사랑 때문에 세계적 오케스트라끼리의 축구 경기도 관례가 돼 가고 있다. 빈 필하모닉은 단원 축구단(www.fk-wph.at)을 가지고 있다. 유럽 내에서는 물론 아시아ㆍ미국 등으로 순회연주를 갈 때 그 지역 오케스트라 단원과 축구 시합을 한다. 무대 밖의 친선이면서 오케스트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올 3월 내한했던 런던 필하모닉 역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 단원과 축구로 격돌했다. 연주일 하루 전이었던 10일 단원들은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무패의 기록을 자랑하는 런던 필은 서울시향을 3대2로 꺾었다. 트럼펫과 타악기 주자의 눈부신 공격력 덕분이었다. 서울시향은 올해 내한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등과도 축구 경기를 할 계획을 잡았는데, 이들 오케스트라의 매니저가 단원들이 연주 하루 전 부상을 할까 전전긍긍했다는 후문이다.

스포츠광인 음악가들에게 ‘부상’은 늘 골칫거리다. 첼리스트 조영창(50)은 농구 게임을 즐기다가 생명과 같은 손목이 부러진 경험이 있다. 클래식 무대에 악마 의상을 입고 오르는 ‘악동’ 나이젤 케네디(52)는 2년 전 내한 공연을 갑자기 취소했다. 축구 시합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결국 지난해 내한한 케네디는 기자회견장에 빨간색과 회색의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애스턴 빌라 축구팀의 붉은색 셔츠를 입고 나오는 위트를 보여줬다.

젊은 연주자들은 조금씩 금기를 깨고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피아니스트 벤 킴(25)은 “부상에 대한 두려움보다 스포츠의 즐거움에 대한 갈망이 훨씬 크다”고 말한다. 그는 “방문을 여닫으면서도 부상은 입을 수 있는 것. 두려워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공연을 며칠 앞두고도 테니스를 치고, 요가·실내 암벽등반·산악 자전거도 즐긴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위험한 운동들이다. 신세대 수퍼스타인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26)은 탁구광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28)은 줄리아드 예비학교의 기계체조 선수였다. 이외에도 수영ㆍ승마 등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기품 있고 깨끗한 소리의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49)은 골프가 주특기다. 그는 인터뷰에서 종종 연주와 라운드를 비교하곤 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다프네’에는 아주 높은 음이 많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필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은 곧 흥미진진함이다. 스스로의 실력을 믿어야 한다는 점도 무대와 필드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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